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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9.13 16:59:57
  • 최종수정2023.09.13 16:59:57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충북도의 남부 지역인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을 남부 3군이라 부른다. 그런데 청주에서 옥천을 가려면 신탄진, 대전 IC 등 대전 지역을 지나 옥천에 이르게 되고 옥천에서 다시 영동을 가게 되므로 충북의 행정 중심지인 청주에서는 상당히 멀리 있는 지역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보은군은 청주시와 인접해 있고 옥천, 영동은 보은에 인접해 있는 이웃 마을인 것이다.

먼저 옥천(沃川)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어떤 의미를 지닌 말들로 이루어진 지명인지,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아보자.

옥천이 옛날 옛적에 불리던 이름은 '골뫼'였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본래 신라 지역으로서 신라시대의 행정명으로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표기되었다. 신라 35대 경덕왕때 이두식으로 표기된 지명을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관성(管城)'으로 표기하였다. 고려 8대 현종때 경산부(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18대 명종 13년(1183년)에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洪彦)을 잡아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여 관호를 폐지하였다가 25대 충선왕 5년(1313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여 경산부 소속의 이산(利山), 안읍(安邑), 양산(陽山)의 3개 현을 관리하게 되면서 옥주(沃州)라는 이름이 나타나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태종 13년(1413년)에 옥주를 옥천(沃川)으로 고치고 경상도로부터 충청도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지역을 부르는 자연 지명인 '골뫼'의 어원은 무엇일까?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와 광주 광산구 명화동에도 '골뫼'라는 지명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의 '골뫼'는 '골미, 동산'으로도 불린다. 그렇다면 산줄기가 벋어내려오다가 볼록하게 솟아있는 곶의 형태를 '동산' 또는 '곶미'라 할 수 있으므로 '골뫼'란 지형적 특성으로 보아 '곶뫼, 곶미'에서 온 말로 추정이 된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궁촌리의 골미,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 상백리의 골미, 강원도 홍성군 갈산면 기산리의 골미,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상안미리의 골미,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의 골미 등은 '곶뫼'가 '골미'로 변이되어 지명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골미, 골뫼'로 변이되기 전에 '곶뫼'를 한자로 표기한 지역에서는 '곶'을 '꽃'으로 보아서 '화산(花山)'이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괴산군 사리면의 화산리,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의 화산리, 진천군 초평면의 화산리,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의 화산리,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화산리, 충남 서천군 종천면의 화산리, 충남 예산군 대술면의 화산리, 경북 경주시 천북면의 화산리, 전북 익산시 망성면의 화산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의 화산리 등의 많은 예를 들 수가 있는데 이들 지역은 한결같이 꽃과 연결지어 '진달래꽃이 많이 피어있는 지역, 또는 마을의 지형이 꽃잎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유래가 전해진다. 울산시 온산읍의 화산리는 '화산(華山)'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지역과 꽃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워 '화(花)'를 후대에 와서 '화(華)'로 바꾼 것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향토대백과'의 기록에 의하면 황해남도 청단군 화산리에 있는 고려시대 성터인 화산성에는 '옛날 이 성안에서 한 무사가 말을 타고 10리 정도 거리에 있는 신생리 벌판의 알메산 목표물을 향해 화살을 날린 후 그곳으로 말을 타고 달렸는데, 목표물에 도착해서 열까지 셈을 센 다음에야 화살이 날아왔다. 이때부터 화살산이라 하다가 줄여서 화산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하지만 이 또한 '곶뫼'에서 변이된 '화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충남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의 '구지매'는 '곶뫼'가 발음하기 쉽도록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옥천을 신라시대의 행정명으로 '고시산군(古尸山郡)'이라 표기한 것은 '곶뫼'의 이두식 표기가 분명하며 경덕왕 때에 자연 지명의 소리값을 버리고 의미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관성(管城)'이라 한 것은 그 의미의 연관성을 더 연구할 과제라고 하겠다. 특히 전북 김제시 금구면도 백제시대에 구지산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금구현(金溝縣)'으로 표기한 것은 옥천 금구천의 어원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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