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2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7.05.03 14:09:53
  • 최종수정2017.06.07 13:43:15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 수필가

제천시 봉양면 원박리에서 시작하여 'S'자 형의 길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돌아 오르길 수십 번, 충북 내륙에서 가장 높은 고개라고 하는 박달재는 해발 560m로서 예전에는 고개가 너무 높고 험했지만, 이제는 고개도 많이 낮아졌고 길도 꽤 넓어졌다. 지금은 천등산을 꿰뚫는 터널이 뚫려 박달재 고갯길은 역사의 뒤안길이 되어 관심이 있는 길손이 향수에 젖어 고갯길을 넘나들 정도다. 그러나 지금도 '울고넘는 박달재'라는 노래는 대중들 사이에 널리 애창되고 있으며 2012년 10월에는 KBS 2의 1박2일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하였다. 유난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이곳 박달재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역사상 전쟁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16년(고종 3년)에 거란 왕자가 대요수국 왕이라 자칭함에 따라 몽고군에게 쫓기게 된 거란대군 10만 명이 내침을 하였다. 고려를 침범한 거란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1217년(고종 4년) 7월에 3만 명의 거란군이 남하하여 제천, 충주 근처에 이르렀는데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이 박달재의 협곡과 고갯마루의 지형을 이용한 전략으로 적군을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김취려 장군이 제천 박달재의 지형지세를 십분 활용하여 거란군을 격퇴시키면서 국가의 전란을 수습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니 박달재는 나라를 구한 전승지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거란군은 많은 포로와 병기 등을 버려두고 도망쳤으며 이후 고려는 포로들을 공전마을에 모여 살게 했다고 한다. 1258년(고종 45년) 10월에도 충주, 제천, 청풍의 별초군(別抄軍)이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요격하여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해 냈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제천현 산천조에 '박달산은 현에서 서쪽으로 35리에 있으며, 주유산의 남쪽 줄기이다. 곧 고려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적(丹賊)을 물리친 처소(處所)이다'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김취려 장군의 전적지가 지금의 제천시 백운면 모정리와 봉양읍 원박리 고갯마루라고 하는데 평토 작업으로 인해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보이는 산기슭은 오래 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이며, 발굴이나 기타 조사는 아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1990년 백운면 노인회에서 김취려 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박달재 고갯마루에 비를 세웠는데 비신 앞면에 '김취려장군전적비'라 새기고, 뒷면에 김취려 장군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박달재 안국사(安國寺)에서 세운 '고려명장김취려장군대첩비(高麗名將金就礪將軍大捷碑)'와 '위열공 김취려 장군의 기마상'이 있으며, 이 밖에 박달재 격전지에는 1988년 9월 20일에 세운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와 1997년에 세운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동상이 있고, 2008년에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사연을 형상화한 조각품과 함께 목각공원에 박달 금봉 가묘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울고넘는 박달재라는 노랫말의 근거가 된 박달과 금봉의 슬픈 사랑이야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박달재 주변에 거란군과 몽고군을 격퇴한 대첩의 전적지를 찾아내고 발굴하여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그 의미를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외세의 침략에 방패 구실을 하던 박달재는 근대에 이르러서도 조선말의 항일 의병전과 6·25 전쟁 때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조선말에 제천 지역에 주둔하던 제천 의병이 중부권 20개 고을을 관리하던 충주부를 공격하기 위해 넘었던 고개였으며, 충주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리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에도 중요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고 하며, 6·25 전쟁 때는 충주에 주둔하던 미군이 이 고개를 넘어 제천 쪽으로 건너와서 작전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던 박달재 아래에는 박달원(朴達院)이 설치되어 수많은 나그네가 쉬어 가는 시설로도 활용되었으며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사연은 그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이야기로 보인다. 박달재 정상에는 서낭당이 있어 고개를 넘는 나그네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고, 박달재 아래에는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는 원서창(遠西倉)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한편, 박달재에는 산적이 자주 출몰해서, 상인들이 고개를 넘을 때는 며칠씩 평동마을에서 머물다가 떼를 지어 넘어갔다고 한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덕암은 도적들이 머물던 근거지로서, 본래 이름은 도적암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으니 박달재는 역사적으로 사연이 참으로 많은 한 많은 고개인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