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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식

시인

시간의 반대편을 향해 걷습니다.

이른 별이 뜬 길 위에서 어둠이 빛으로 혹은 빛이 어둠으로 변할 때 저녁이 슬프다는 걸, 그리움이 아프다는 걸 압니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 어둠 저 건너편 점점 희미해지는 산 그림자처럼 하루를 헤집고 간 기쁨과 슬픔의 시간이 하나둘 기억에서 멀어져갑니다.

무작정 걷다가 발밑에 쌓이는 어둠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멀리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간혹 일찍 뜬 별들만 잠겨있는 숨죽인 수면을 향해 가쁜 숨을 고르며 어깨 위에 내려앉은 하루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순간 모든 것이 멈추었습니다. 산도 강도 나도 지워지고 있습니다. 어둠이 오늘의 시간을 과거의 시간으로 차곡차곡 저장하고 있습니다.

문득 어둠의 중심으로 물오리 한 마리 날아오릅니다. 아주 잠깐, 늦은 물오리의 날갯짓에 놀란 물보라가 사라지고, 강 건너 불빛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늦은 강가 짙은 어둠만 수북한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자정이 가까운 모든 것이 멈춘 시간 난 아직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과거를 향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멈추려 할수록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멈추어 있는 것도 멈추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시간도, 강물도,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이야기도 기억 어디쯤 머물러 있습니다. 문득 슬퍼지거나 하냥 눈물이 나거나 무심코 미소짓는 이유도 그런 까닭입니다. 한때 멈출 수 없었던 기억 저 안쪽에 남아있는 시간이 아픔으로 슬픔으로 더러는 그리움으로 변해갈 때, 멈춘 것과 멈추지 않는 것의 경계도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경계 같아서, 그리움의 경계 같아서, 빛바랜 기억 같아서, 오늘도 이렇게 홀로서 지워져 가는 하루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둠을 털고 일어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갑니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흩어졌다 모이는 어둠, 어둠이 지워가는 세상의 시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반대편을 향해 걷다 보면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아린 기억들이 눈에 밟혀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걸음은 내일을 향해 가고 있는데 마음은 자꾸 반대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밤 오래 강가에 서 있으면 그럴 때 있어요.

오늘도 자정은 넘겨야 집을 향할 수 있겠지요. 늘 그렇듯 하염없이 여기 앉아 저 강의 수심보다 더 깊은 가슴 어디쯤에서 슬픈 기억 하나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기어이 나를 아주 긴 한숨 속으로 밀어 넣겠지요. 할 수 없어요. 나이테가 나무의 하루하루를 기억하듯 지난 수십 년을 내 가슴이 기억하고 있는걸요. 이렇게 무심코 꺼내 보는 기억이 그리워 늦은 시간 이곳을 찾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걸요. 오늘은 가슴이 하는 데로 나를 맡겨둬야겠어요.

사는 게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죽을 듯 마음 아프다가도 그 통증에 무뎌지고 서서히 잊혀지는 그렇게 오늘에 익숙해져 가지요. 눈감고 무릎 세우고 어둠에 등을 맡기고 있어요. 날카로운 불빛이 지나간 자리 더 깊은 어둠이 찾아들고 아주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더 깊은 고요를 만들어요. 누군가 나의 어깨를 칠 때까지 난 어둠에 둘러싸인 슬픔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가슴 누르는 고요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게 지금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니까, 문득 찾아온 그리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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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버티면 잊혀진다는 나쁜 선례가 생기지 않도록 유가족과 피해자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 오송참사 1주기를 맞는 더불어민주당 오송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TF단장을 맡고 있는 이연희(청주 흥덕) 국회의원의 입장은 여전히 단호했다. ◇오송참사 1주기를 맞아 더불어민주당 '오송 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TF' 단장으로서 소회는.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함을 느낀다. 지난 달 19일 유가족분들과 함께 궁평2지하차도에 다녀왔다. 자동진입차단시설이 설치되긴 했지만, 미호강 범람 시 지하차도에 물이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는 차수벽이 설치되지 않았고, 관련 정비가 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충북도는 장마를 앞두고 궁평2지하차도를 급하게 재개통하려 했다. 유가족과 시민사회의 반대로 개통이 연기되긴 했지만, 충북도가 벌써 오송참사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던 아픔을 잊은 것 같아서 화가 많이 났다. 유가족과 피해자의 시간은 아직 23년 7월 15일에 멈춰있는데, 충북도는 참사를 서둘러 무마하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참담했다. 지자체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정부에서 진상규명을 외면하는 사이, 유가족과 생존자분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진상규명과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