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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시집을 읽다 말고 베고니아 꽃잎을 바라본다. 무수히 핀 꽃은 붉은 살점 같기도 하고 푸른 잎에 돋은 영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물과 대상을 만날 때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사유를 투영한다. 같은 대상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그건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속성에서 비롯한다. 눈을 돌려 고통과 사랑에 젖은 시를 다시 읽는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예수다

나이프 들고 웃음 짓는 동물성 식탁 앞에

꽃무늬 속살 드러낸 채

핏물 머금고 매달려 있는 슬픔 덩어리

풀빛 혈통 속에 흐르던

되새김질의 추억은 날 선 칼날에 잘려 나가고

검은 목장에 코뚜레가 꿰어져

핏물 흥건한 들판을 비틀거리며 건너왔다

미슐랭의 별 반짝이는 은접시 위에서

머리 잘린 소가 붉은 울음을 운다

초록의 빛은 쓰러지고

어둠의 목구멍이 온 세상을 삼키는데

별빛 따라 도는 순례객들로 맛집 앞은 출렁거리고

사지를 벌린 그의 십자가가 허공에서 휘고 있을 때

배부른 배고픈 바람의 입술이 중얼거린다

활짝 핀 꽃잎 정말 살이었을까

─ 유정남, 「꽃잎의 살」 전문 (시집 일요일의 화가 8요일의 시인, 도서출판 북인, 2023)

시 속에는 여러 장의 그림이 숨어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예수'─ 첫 행이 매우 강렬하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적 배경을 생각해 본다. 작품 내에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이 구절은 렘브란트의 그림 '도축된 소'가 모티브다. 뒷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단 푸줏간 창고의 소를 그린 그림이다. 검은 공간에 매달린 핏덩어리의 소는 참혹한 느낌이다. 머리는 잘렸고 가죽은 벗겨졌으며 복부가 갈라진 채 뼈가 드러난 모습이다. 식탁 접시에 담긴 쇠고기 부위를 보며 시인은 렘브란트를 오마주(hommage)한다.

미슐랭 가이드에서는'훌륭한 요리를 맛보기 위해 찾아가는 식당'을 별 개수로 가치를 매기는데, 별 숫자에 따라 등급이 달라진다. 이 시의 시적 공간은 '별빛 따라 도는 순례객들로' 출렁거리는 '맛집 식당'이다. 거기에서 화자는 '슬픔 덩어리'를 만난다. '은접시 위에서 머리 잘린 소가 붉은 울음을 운다.' 들판을 뛰던 야생의 '풀빛 혈통'은 인공으로 상징되는 '검은 목장'과 '코뚜레'에 의해 사육되어 종국에는 '날 선 칼날'에 의해 부위별로 잘린다. 노련하게 마무리된 소의 육질은 접시에 담겨 꽃처럼 화자 앞에 놓인다. 그건 누군가를 위해 희생된 제물로 보인다. 화자는 소의 형상에서 예수의 모습을 찾아낸다. 시는 죽음으로 인류에게 구원을 준 예수와 물질적 양식을 주는 소를 대비하며 인간의 폭력적인 탐욕을 그린다. 소의 죽음을 통해 '어둠의 목구멍'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욕망이 온 세상을 삼키고 있음을 이야기하며'미슐랭의 별'로 상징되는 심리적 충동과 갈증을 비판한다. 정신의 자양이 사라진 황폐한 세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지를 벌린 그(소=예수)의 십자가가 허공에서 휘고 있을 때' 화자는 새로운 인식에 다다른다. 물질적으로 '배부른' 그러나 '배고픈' 영혼을 가진 이의 '입술'은 '활짝 핀 꽃잎'이 살(肉)인 동시에 영혼이라는 감각적 인식을 한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된 게 아니다. 살로 이루어진 꽃잎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존재함을 뜻한다. 우리 영혼의 실존은 무수한 살의 죽음이 있어야 함을 시는 알려준다. 시인이 끝내 말하고 싶었던 건 고통스러운 죽음이 내보이는 침묵의 사랑, 즉 우주적 원리에서 근원 하는 원초적 사랑 아니었을까.

베고니아 꽃잎 하나가 고개를 꺾는다. 붉은 꽃잎의 살에 숨어있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삶이 영속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식탁 앞에서 늘 경건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고통과 사랑으로 빚은 시인의 꽃잎이 눈앞에 떠오른다. 매달린 붉은 살 속에 숨은 영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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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