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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자

수필가

무더운 7월 중순이다. 지금쯤 한창 피어날 연꽃을 보러 지인과 함께 그리 멀지 않은 연방죽으로 향했다. 좁다란 농로를 달리다 굽은 길로 돌아드니 길 옆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고 언덕 바위에 새겨진 한자로 된 글씨를 탐독했다.

"한원(漢原) 노선생(盧先生) 폭서암(曝書巖) 문인(門人) 황득효가 기록하다(黃得孝書) 가경 무진 1808년 여름 嘉慶 戊辰 夏"이라 새겨져 있었다. 힘찬 글씨체로 쓴 폭서암(曝書巖)이란 한원(漢原) 노긍(盧兢)선생이여기에 습기 찬 책을 말렸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장수바위 또는 장 바위라고 불리게 된 것도 노장수가 살던 바위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옛날에 이곳에 장수가 살았는데 이분이 장암리 노(盧)씨의 조상으로 조선 영조 때 유명한 문장가이며 시인이었다고 한다. 이 양반이 바위 위에 정자를 세우려고 그 바위를 덮고 있는 뚜껑처럼 생긴 바위를 옮기려 하자 난데없이 뇌성병력을 당하게 되어 정자 세우는 일을 중지했다고 한다. 이 바위는 마치 마을 어귀에서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듯 했다.

좁고 굽은 길을 따라가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놀랐다. 연못 위를 뒤덮고 있는 연꽃과 연잎이 방죽을 꽉 채웠다. 군데군데 활짝 핀 백련과 홍련 향이 코끝에 스쳐 마치 그 향이 반겨주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부풀어 오른 연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피어날 것처럼 싱그러운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들떠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적기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 가운데를 가로질러 데크 길을 만들어 놓아 연못 중앙을 통과할 수 있어 좋았다. 길 양편에는 청주문협회원들의 작품이 전시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뜨거운 태양열의 더위도 잊어가며 한 편도 빠짐없이 작품 감상에 젖어들었다. 한 편 한 편을 읽다보니 연못 중간에 있는 정자까지 닿았다. 정자 안의 벽에는 필자가 쓴 '순수 그 아름다움으로' 라는 작품도 걸려 있었다. 부여의 궁남지에 가서 본 연꽃을 보고 쓴 글인데 이곳에도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연꽃도 보고 시감상도 할 수 있도록 전시된 연꽃방죽은 그야말로 자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분위기 있는 전시관이라 너무 좋았다.

연꽃은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인 주돈이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삶을 비유했다. 또 조선시대 퇴계와 같은 유학자도 도산서원 연못에 연꽃을 심어놓고 즐겼다고 한다. 아무리 더러운 곳에 있어도 맑음을 잃지 않는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상징으로서의 연꽃을 노래하였다. 즉 군자는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어도 탐욕(貪慾)에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맑고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정화한다고 하여 군자의 상징으로 삼았다. 불교와 상관없이 유학자들도 가까이 하며 사랑했던 연꽃이다. 또 고대 서양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품은 연꽃은 태양과 희망의 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자가 아니더라도 아끼고 좋아하는 꽃으로 여겼다.

특히 불교 경전인 묘법연화경에서는 연꽃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예를 든다. 물속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 수면 쪽에까지만 올라오는 것, 그리고 물속에서 솟아올라 피는 것 등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는 구제될 수 없고, 둘째의 경우가 가르침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셋째는 구제가 필요 없는 것이다. 연꽃의 청정함을 의미하기보다는 구제의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는 사바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의미에서 불교의 상징이 된 연꽃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서 짜증이 나고 속상한 일이 있어도 꽃을 보면 마음이 녹는다. 일상생활에서 즐겁고 기쁜 일에는 축하의 꽃이요, 슬프고 아픈 일에는 마음을 달래줄 위로의 꽃을 주고받는다. 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로 대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꽃을 보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즐긴다. 무더운 여름날 이곳에 와서 곱게 핀 연꽃 향을 접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연못 전시관에서 소소한 행복을 만끽했으니 탐욕도 다 사라진 듯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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