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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애

수필가·공인중개사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튿날, 건강검진을 갈 때 잊지 않기 위해 색상이 예쁜 주황색 채변 통을 소파 위에 놓아두었던 터다. 그런데 그날 아침, 전(前) 날부터 금식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채변 통만 들고 나가면 되는데 채변 통이 없었다. 소파를 끌어내고 피아노 위를 뒤지고 하물며 책상 서랍장을 열어보아도 온데간데없다. 2년마다 한 번씩 국가에서 무료로 해주는 검진이 아니고 거금(?)을 들여 하는 종합검진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정밀하게 받고 싶었는데 이미 정신이 흩어졌다. 예약 시간 임박하게 도착한 뒤 이곳저곳을 간호사의 부름에 따라 쫓기듯이 검진했다. 각종 암 검사와 공명영상촬영(MRI)을 위해 둥글고 긴 기계 통속으로 들어 갈 때는 묘한 불안감이 들기도 했고, 내과 검진을 하기 위해 수면마취를 할 때는 지인이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을 당했던 기억이 도렷이 떠올랐다.

지난 5월, 햇빛은 생선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고, 아파트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탐스럽게 피어있을 때 나는 지옥문 앞까지 갔다 왔다. 약 처방을 받으면 2주일, 그냥 있어도 보름이라는 감기를 한 달 가까이 껴안고 있었다. 예전의 젊은 날처럼 쉽게 생각했고, 또 계절 탓도 있어 나아지는가 싶어 시원한 과일을 먹으면 또다시 잔기침으로 이어졌다.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고삭부리가 된 신체에 마음은 무너졌다. 기운이 쇠잔해져 자꾸 자리에 눕고 싶고, 바닥이 어딘 줄도 모르게 정신은 까무룩 하게 꺼져가는 듯했다. 지나온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람과의 정을 붙이려고 오지랖을 펼쳤던 일과 시간을 금쪽처럼 아끼며 살아온 날들이 모두 여들 없게 느껴졌다.

태생적으로 야물지 못한 체질인 나는 후천적으로도 체력단련을 위한 노력이나 운동을 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최장수 왕이었던 영조는 지금으로 말한다면 건강염려증이 있었던 걸까. 궁궐 안에 있는 내의원에서 사흘에 한 번씩 재위 기간 52년 동안 무려 7천 번 정도 진찰을 했다고 한다. 자기관리가 투철한 정신은 현대인들도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철저했는데, 그래서인지 66세에 51세나 어린 왕비를 맞아들였고 칠십이 넘은 나이에 검은 머리가 다시 나오고 팔십이 넘어서는 치아가 새로 나왔다고 실록에 나온다.

'엎친 데 덮친다.' 나쁜 일은 겹치어 일어난다더니 꼭 그 격 이었다. 아파트 이웃 동에 사는 딸아이 내외가 코로나 진단을 받았다. 역병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을 때였지만, 이제 백일이 지난 아기가 함께 있어야 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간식을 갖고 위로라도 하려고 찾아갔지만, 현관문을 배꼼 하게 열어본 딸은 거리를 두고 말했고 면역력이 약한 나 또한 조심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다 울고 말았다. 이때 미욱한 인간의 마음에서는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격리 일주일이 지나고 검사가 음성으로 나왔을 때, 긍휼히 여긴 신의 가호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천만다행한 것은 아기가 건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아픈 만큼 성숙한 것일까. 두어 달 감기로 시작한 몸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깔밋하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도 그려 보았다. 건강의 소용돌이가 끝난 어느 날 아침, 그렇게 찾아 헤맸던 채변 통은 컴퓨터 책꽂이 옆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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