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 왜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은 파천(播遷)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된다. 파천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일을 말한다. 이를 처음 거론한 사람은 선조 자신이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 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우승지 신잡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엔 80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수찬 박동현(朴東賢)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단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가마)을 멘 인부도 길 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하면서, 목놓아 통곡하니 상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 왜군의 북진 속도는 무척 빨랐다. 자칫 임금까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앞서 적들이 충주에 도착하여 정예병을 아군처럼 꾸며 경성으로 잠입시켰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따라서 역대 왕들은 미래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초기에 도참서적을 집에 간직하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동천록, 통천록, 호중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효유는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이 도탄에 빠질 때는 어김없이 도참사상이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무학이 지은 도참기가 나돌았다. 선조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국초에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1386)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석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방어하
소라야. 이번엔 정말 가고 싶었던 북유럽으로 가.전에는 그저 일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여행이란 걸 했다면 지금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아서 자꾸만 떠나고 싶은 것 같아. 거기에 뭐가 있기에 자꾸 가냐구?글쎄.....뭐가 있어서 보러 간다는 것보다 난 그 낯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공기를 함께 마신다는게 좋아.어쨌든 오늘부터 열흘 간 나와 함께 나가보자. 미지의 세계로....오늘 오전, 잔뜩 찌푸린 하늘이 불안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하려고 큰 며느리 차에 올라타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여행 중에 맞을 비를 다 맞고 간다고 좋게 생각하며터미널에서 일행을 만나 인천공항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지.오후 4시 반에 비행기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우리 시간으로 새벽 2시가 넘어 있었어.모스크바 시간으로는 밤 9신데도 대낮처럼 환하니 잠을 어떻게 잘지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설렘과 기대로 올 것 같지 않은 잠인데 어떻게 청해야 할지… 두터운 커텐 속에 부푼 가슴을 묻고 모스크바의 첫날밤을 얌전하게 보냈어. 오늘 밤부터 열흘 간 백야와 정면대결 할거니까… 태극기가 펄럭이는 호텔 앞마당 분수광장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미
추소리의 둥그나무는 빙둘러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족히 서너명은 되어야될 정도로 우람하다. 그로부터 뻗어나간 가지는 하나의 거대한 아지트처럼 그늘지지만 아늑하다. 추소리는 그 둥그나무를 중심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길가 언덕위에 자리한 둥그나무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 윗마을 추소리이고 둥그나무에서 동남쪽 300m 아래 대청호변에 위치한 마을이 아랫마을 추소리이다. 금강의 물줄기가 휘어감아 나가는 한쪽 자락에 암봉들이 끝없이 줄지어 서있는 일명 병풍바위로 유명한 아랫마을 추소리의 절경에 반하여 일찍이 우암 송시열은 소금강이라 이름 지어 노래했는데, 이 바위산의 절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반면 둥그나무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는 윗마을 추소리는 마을이 수몰되면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게 된 곳으로 둥그나무가 있던 길은 예전부터 추소리 사람들이 읍내 가려면 이 둥구나무까지 올라와 길을 가야했다고 한다. 추소리가 수몰되기전에는 탑신제를 매년 올렸었는데 이주할 때 탑신제당을 이전을 하지 못하고 물속에 두고 온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마을사람들은 둥구나무아래 '추소리탑신제당'을 복원하였고
마음이 허전해 무량사를 찾았다.무량은 셀 수 없다는 말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도 셀 수 없는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말이다. 곧 무량사가 극락이라는 뜻이다.극락이 있는 곳 무량사 길에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에 먼지를 씻어준다. 매표소에 오르니 일주문이다. 일주문이 마음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중생도 하나라 생각되어 앞을 보니 산 까치들이 먹이를 찾다말고 나를 맞이하듯 나뭇가지에 올라 날개 짓을 한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던데 이 산사에 반가운 길손일까 아니면 세속의 찌든 먼지나 털고 가는 그런 중생이 아닐까 생각하니 출가하는 마음 같아 만수산 산자락에 있는 무량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이 길을 오르다가 천왕문 앞에 통일 신라 시대의 조형을 따라 만든 고려 때 당간지주가 산사로 안내를 한다. 천왕문으로 들어가면 동, 서, 남, 북을 수호하는 각각의 천왕들이 모여 사천왕문 되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부처님 도량으로 향하는 중생을 수호하고 몸과 마음 상태를 가다듬어 오르라는 무언중 교훈을 주는 보탑, 창, 칼, 보탑, 비파에 몸매를 가다듬고 천왕에게 빈배를 하였다.경내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꽉 차 극락전, 5층 석
실록의 표현을 빌면, 왜군들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달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희립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사했다. 그 와중에 사잇길로 도망을 쳐 살아남은 장수가 있었다. 순변사에 임명됐던 이일(李鎰·1538∼1601)이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제 1군은 파죽지세로 밀양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조선 조성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 급히 경북지역으로 파견한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임시로 단기간 파견되는 특사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이때의 조정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청대하였으나 (임금은)비답하지 않았다. 계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냈다. (…)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청대'는 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을, '비답'은 임금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선조 22년(1589) 비변사의 대신들은 각자 무신들을 추천한다. 능력있는 무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방력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책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이때 대신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은 이종장(李宗張·?~1592)을 추천했다. 이런 흐름 속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 정사와 부사로 보내, 일본을 정탐케 한다. 그러나 둘이 귀국해 올린 보고서 내용은 정반대였다. 서인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임으로 대배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반면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을 올렸다. 당시 조정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됐다. 당시 서인들은 이른바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다. 따라서 선조는 서인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봤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서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등이 대거 귀양을 가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계절은 3계절뿐이다. 우리나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게 아니라 더운 계절, 아주 더운 계절, 미치도록 더운 계절만이 존재한다. 4월은 미치도록 더운 계절에 속한다. 한반도에서는 진달래꽃에 이어 철쭉이 봄의 한 중간을 달리고 있는데 인도차이나 반도는 펄펄 끓는 가마 솥 더위는 지구상의 생명체를 무차별로 구어내고 있다. 그곳 여름의 보통 기온은 섭씨 36~38도를 기록하는 데, 체감온도는 42도쯤 된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곳곳을 여행하자면 하루에 생수 4~5병은 준비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했다간 탈진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모자나 양산은 필수장비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속칭 '뚝뚝이'를 타면 자연의 바람으로 염제(炎帝)를 어느 정도 쫒을 수 있다. 5~6월, 우기로 접어들면 고온 다습하여 여행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섭씨 40도가 넘으면 일상사를 멈추고 휴식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겨울에 해당하는 1월의 기온도 섭씨 18~20도에 달하는데 이때는 더러 동사자도 발생한다. 더위에 익숙한 현지인들이라 그런지 36도쯤의 폭염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 왕국의 영화를 접어두고 가장 먼저
신립이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달천강에 투신할 때 함께 자살한 인물이 있었다.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金汝山+勿·1548~1592)이다. 종사관은 장수를 보좌하는 장교로, 종6품에 해당한다. 김여물은 임란 직전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정철(鄭澈·1536~1593)의 사람'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돼 있었다. 정철은 이때 동인의 모함을 받고 막 실각된 시기였다. 정철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당시 영의정)와 함께 광해군 책봉을 건의키로 했다. 이는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이 때 선조는 인빈김씨에게 빠져 있던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을 책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같은 그 파장은 같은 당인 김여물에게도 미쳤다. 옥중의 김여물을 구해준 사람은 서애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자기 막중(幕中), 즉 참모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인간 됨됨이를 알고 자기 종사관으로 임명, 함께 출전하게 된다. '신립이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
맑은물 굽이굽이 휘돌아가고 비단강 금빛모래 뛰어놀던 곳 어미소 한가로이 풀뜯던 벌판 오봉산 소쩍새 가냘픈 울음소리 꿈에나 그려지는 아득한 고향...석호리 마을 유래비에 새겨진 글귀에선 깊게 파인 깊이만큼 꼭 그만큼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대청호 담수가 시작되면서 본래 마을이 있었던 곳은 모두 물 속에 잠겨 버렸고 주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부는 수몰선을 벗어난 인근으로 일부는 새로이 조성된 이주단지로 또 일부는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남은 사람들이나 떠난 사람들이나 지척에 있는 그곳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개발논리에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까닭이요 마을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과 호수 허름한 마을들과 실핏줄처럼 그어진 길 수몰의 한을 품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대청호 주변 사람들이 그려내는 고향의 정취는 아픔과 이별 슬픔과 서러움 그 위로 덧칠된 그리움 때문이려나...한걸음 한걸음 발길 빌어 마주하는 풍광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대청호 둘레길 10구간은 옥천군 군북면 소재 석호리, 이평리, 보오리, 지오리, 이백리, 환평리, 추소리에 걸쳐 형성
임진왜란 참패의 원인을 두고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전략부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새재에서 지키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칠 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 성과를 거뒀다. 전문가들은 신립의 이 같은 성향이 협곡보다는 탄금대 앞 개활지에 진을 치게 한 것으로 봐왔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일부 사가는 신립이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이다. 같은 날 왜군은 벌써 새재 밑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충주~새재와 문경~새재는 거리상 비슷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새재에 도착할지는 서로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런데 새재는 충주 사면이 더 가파르다. 이 점이 신립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일부 사가는 보고 있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은 익히 알려진대로 배수의 진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한다. 이후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사를 지역단위별로 모집하고, 이를 지휘할 장수는 중앙에서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두고 온정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산 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과천리에 있는 수덕사를 오르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 조용한 산사를 울린다.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스님의 길 찾아 수덕사는 모든 고뇌에서 해탈, 자신의 모든 명목을 추구하고 덕을 닦게 하여 모든 중생을 복과 덕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에서 수덕이라 한단다.이 덕이 머무는 곳을 찾아 속세의 인연들을 끊고 스님이 되기 위하여 출가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모든 번뇌, 망상을 이겨야 한다.이 고통과 싸워 이겨야 출가자가 된다. 부처님께 몸 바쳐 출가하는 데는 아무 자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출가 한다고 해서 누구나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제한도 있고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흉터가 있는…
얼마전 충암 김정(金淨)의 후손들이 충암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 목록에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만동묘정비 탁본, 경주김씨족보 초고본, 송시열이 제주도에 지은 농맹혹문정의통고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1486년 지금의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1살인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일부 한문학자를 제외하고 그를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명현 조광조와 '절친'의 관계였다. 따라서 중종 때의 개혁 정책은 거의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됐다. 도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이때 폐지됐고, 대신 숨은 인재를 천거 형식으로 선발하는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됐다. 특히 그는 '국왕도 현인·철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기(修己), 즉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철군주론이라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학정이 군주의 자질미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유학(幼學) 윤세정 등이 상소하
비례부동(非禮不動),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옥조빙호(玉藻氷壺), 만절필동(萬折必東), 충효절의(忠孝節義). 괴산 화양구곡에 암각 글씨로 새겨진 표현들로, 모두 우암 송시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중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뜻인 비례부동은 첨성대 초입에 새겨져 있다. 첨성대는 화양구곡 제 6곡에 해당한다. 바로 옆에는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비례부동 글씨를 쓴 인물이 숭정황제임을 알게 하고 있다. 숭정은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이다.우암이 중국의 여러 황제 중 유독 명나라 의종의 친필을 화양동에 새긴 것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수암 권상하가 스승 우암의 유언을 받들어 세웠던 만동묘에는 명나라 의종 외에 신종의 위패가 봉안됐다. 신종은 주색에 빠져 정사를 잘 돌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대신 환관들이 정사를 대신 봐주는 환관정치가 판을 쳤다. 그러나 신종은 조선전쟁, 즉 임진왜란에 대해 관심이 무척 컸다. 사가에서는 그 이유를 이른바 '속방'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는 속국과는 다른 개념으로, 중국은 천자의 나라가 되고, 주변국은 그 천자의 권력을 존중하는 질서에 따라 외교관계를 맺고 교
행궁(行宮)은 임금이 장기 출타를 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한다. 달리 '행재소' 또는 '이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병을 치료하거나 민정을 살피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때 단기간 출타할 때는 막사에서 지내지만, 장기간 출타를 할 때는 별궁을 급조했다. 초정약수는 세계 3대 광천수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은 다른 약수와 크게 구분되는 편이다. 몇해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초정약수 성분을 조사했다. 그 결과, 초정약수의 톡쏘는 느낌은 탄산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성원리는 다음과 같다. 지하 깊은 곳의 마그마는 메탄, 유화수소, 이산화탄소, 질소 등의 기체 성분을 갖고 있다. 이중 이산화탄소가 지하 심층수와 만나면서 만들어낸 것이 탄산수이다. 톡 쏘는 맛은 탄산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초정약수의 이산화탄소 분압은 다른 약수보다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초정약수의 알싸한 맛에는 철 성분이 관여를 한다.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탄산수는 용출되는 과정에서 암석층을 만나게 된다. 이때 암석층내 철성분이 탄산수에 녹아 들어간 후 지표로 용출하게 된다. 여기서 알싸한 맛이 발현된다. 초정일대…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파리하여 우습게 생기었지만 마음만은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시정간(市井間)에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온달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온달이 실제 바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나, 대체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보고 있다. 그 근거는 평강공주와 결혼할 당시 그의 관등이 '大兄'이었기 때문이다. 대형은 고구려 조정의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직위다.5~6세기 무렵의 고구려 조정에는 이른바 '국내성파'와 '평양파'가 존재했다. 사가들은 위와 같은 정황을 들어 온달 가문이 본래는 '국내성파'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장수왕의 평양천도 때에 '평양파'가 득세했고, 여기에 온달 가문은 정변에 휘말리면서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조정이 어떤 필요성에 의해 '국내성파'를 껴안으면서 온달도 중앙정계에 복귀했고, 이것이 설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라는 것이다.이때의 어떤 필요성은 남쪽에서는 나제연합군이 한강유역에 쳐들어왔고, 북서쪽 국경에서는 돌궐이 동진해오는 것을 의
한쌍의 불빛이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밤하늘에 동그라미를 우아하게 그리며 나타났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오케스트라의 반주 같았고 밤하늘의 달과별은 빙판을 비추는 조명과도 같았다. 하늘 한쪽 구석에 불빛을 그렸다 사라지는 별똥별은 반딧불이의 묘기에 환호하는 자연이 터뜨린 폭죽 같았다...반딧불이와의 감격스런 첫만남을 표현한 어느 곤충연구가의 글이다. 반딧불이는 1급수의 물이 흐르는 깨끗한 환경에서 사는 곤충이다. 따라서 반딧불이가 살고 있다는 것은 그곳이 깨끗한 청정지역임을 뜻한다. 그래서 최근엔 지자체별로 잘 보전된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개발된 교육공간은 또다른 환경 교육의 장으로의 활용가치와 함께 친환경 산업으로의 육성이 활발하다. 그 증거가 바로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반딧불이 축제와 반딧불이를 주제로 한 생태공원이다. 대청호 인근 우리 고장에도 반딧불이 서식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로 매년 여름철이면 반딧불이를 이용한 임도 체험과 여름 밤길걷기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반딧불이뿐만 아니라 겨울쳘이면 빙어 낚시와 썰매타기등 겨울문화체험 행사 또한 치르고 있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지역주민들의
◇ 동해구 대왕의 얼을 찾아 검은 조약돌이 수 없이 깔려있는 동해바다 봉길해수욕장이다. 그 앞 바위군이 파도가 오가는 세월속에 신라의 역사를 지켜 온 곳이다. 횐 거품을 토하는 바다에 서서 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면 아기자기한 바위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 군이 자리를 하고 동서남북 4방으로 가운데에 가공한 고랑이 패어있다. 주위에 자연 암석들이 기둥 모양 세워져 있다. 중심 길이가 약 3.5m 되는 고랑 안에 거북 등 모양 길이 3m, 폭 2.2m 의 돌이 얹어져 있는데 고랑에는 약간의 물이 항상 덮여져 있다. 사방을 트은 십자형 수로를 통해 물이 들어와서 세 고랑이로 서서히 쪼개져 빠져 나간다. 이는 거북 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 물은 항상 움직여 웅덩이의 수온을 조절하여 영원히 변치 않게 하는 1300년 전 과학이 여기에 있었다. 이 돌 밑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장치되어 있었다 하는데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둘러싼 주위 환경과 인근 주민들의 구전으로 내려온 설화,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떠낸 흔적이 등이 대왕암으로 불러 왔다. 사실 옛 부터…
"경영자로서 제가 할 일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체크를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걸 안 거죠. 그러기 위해서 회사가 내 거라는 집착부터 없애야 했어요. 회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충북의 대표 향토기업인 ㈜충북소주 장덕수 대표(51)가 회사를 둘러보며 직원들에게 한 말은 "더 열심히 하라"는 독려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 서로 위해주고 즐겁게 일하고 함께 행복해져요"라는 말이었다. 사장이 먼저 웃자 직원들이 웃었고 공장이 환해졌다.주류회사 말단 영업사원부터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투자하고 피나는 과정을 거쳐 이제 정상의 자리에서 지역경제를 선도하고 있는 장 대표. 그가 외부자본에 의존해 운영돼 오던 지역소주회사를 인수한지 6년여가 되어간다.장 대표는 지난 2004년 10월 '시원소주'를 인수해 판매선점 22%에 불과하던 소주시장을 40%까지 끌어 올리고 자사의 독자 브랜드 '청풍(淸風)'을 개발, 지방소주 업체로선 최초로 일본에 수출하는 등 충북소주를 성장궤도에 안착시킨 장본인이다. 오늘에 이르게 한 장 대표의 삶은 선택과 도전 그 자체였다. 충주 출생인 장 대표는 충주고와 충북대 농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장 대표는 1985년 9월에…
중원고구려비(국보 제 205호)는 높이 2.3m, 폭 55cm로, 글자 한 개의 크기가 대략 3.5cm 정도 된다. 광개토대왕비와 마찬가지로 사면 모두에 글자가 새겨진 4면비다. 본래 예서체 한문 글자가 400여자 정도가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마모가 심해 현재는 25% 정도인 100여자 정도만 판독이 가능하다.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등장해 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甲寅'이라고 쓰여진 日간지이고, 또 하나는 '신유년'이라는 年간지다. 이를 근거로 건립연대를 추정한 결과, 전자는 장수왕37년(449), 후자는 장수왕 69년(481)이 된다. 현재 두 가지 설중 '449년설'이 보다 많이 인용하는 편이다. 비의 성격은 발견 당시에는 척경비설이 유력했다. 즉 국경을 새로 개척하고 세운 비로 봤다. 그러나 비문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판독되면서 지금은 사실상 '회맹비'(會盟碑)로 굳어졌다. 회맹비는 어떤 사건이 원인이 돼 양자 사이에 임금과 신하, 또는 형과 동생의 관계를 비문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중원고구려비 비문에는 '세세위원 여형여제'(世世爲願 如兄如弟)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직역하면 '영원토록 형제같이 지내기
'영결편지'는 곧 죽을 사람이 산 사람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말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국문을 받기 위해 귀양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숙종의 사약을 받고 전북 정읍에서 죽었다. 이때 수제자 권상하에게 남긴 영결편지에는 '괴산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 공간인 만동묘(萬東廟)를 세워라'라는 유언이 들어 있었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도운 인물로,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표현된다. 재조지은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도움을 준 은인이라는 뜻이다. 의종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으로 처들어오자 처첩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에서 자살한 인물이다. 제천 한수에서 달려온 권상하는 유언에 따라 숙종 29년(1703)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라는 큰 사당을 건립하게 된다. 이때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온 이름으로,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충절의 표현이다. 우암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으로 화양동 석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엄청나게 큰 글씨를 새겼다. 애각(崖刻)이라고 한다. 민정중이라는 인물이
역사 이래로 청주·청원은 같은 생활권역에 속했다. 생물학적인 비유를 하면 자웅동체가 된다. 그런 청주가 미군정하인 지난 1946년 6월 1일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으로 분리됐다. 행정적으로 이산가족이 됐다. 이때의 '부'(府)는 행정상 '시'(市)와 거의 비슷한 지위를 지닌다. 미군정이 왜 이같은 행정적 조치를 취했는가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인구가 갑자기 늘었거나 도시적 변동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일단 지방자치 확대 일환, 당시 최고 수장인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도청 소재지가 위치한 청주에 대한 배려 등 3가지를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는 청주·청원이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서울특별시헌장을 채택한다. 이 경우 행정 위계나 흐름상 청주·청원 분리는 서울특별시헌장 다음에 와야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청주·청원은 그보다 두 달 이른 그해 6월에 분리됐다. 충북도지사의 사전요청 건도 분리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윤하영(1889~1956)으로, 그는 미군정의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1
조선시대 김만균이라는 인물은 현종이 청나라 사신 접대 장소인 모화관에 갈 때 임금을 모시는 것을 거부했다. 병자호란 때 할머니가 청나라 군사에게 안 좋은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승지 서필원이 할머니에 대한 의리는 사적인 것이고, 임금을 모시는 것은 관리된 자의 공적인 도리라며 그를 비난했다. 승지는 지금의 청와대 고위직에 해당한다. 현종도 화가 나 "임금을 우습게 알고 모욕한다"며 그를 하옥시켰다. 그러자 옥천출신 우암 송시열이 임금의 처사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임금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공적 임무일 뿐이며, 조-손 간의 의리는 사적인 것 같으나 실은 인륜을 밝혀 인심과 천리를 유지하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므로 오히려 장려할 일이지 죄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김만균은 곧 풀려날 수 있었다. 조선 임금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사림이 등장하고, 이들이 도학(道學) 정치를 추구하면서 왕권의 위상과 행사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사림은 이른바 세도권(世道權)을 내세워 번번히 왕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세도권은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 외척의 세도(勢道)와는 다르다. 사림의 지지를 등에…
국보 제 198호인 단양 적성비는 그 발견 경위가 다소 극적이다.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 박물관팀은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1978년 1월 6일 단양 적성 일대를 방문한다. 간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단원들은 등산화에 묻은 진흙을 자주 털어내야 했다. 이때 한 단원이 한 뼘 정도 노출된 돌부리에 진흙을 터는 순간 암석 표면에 '큰 大', '방패 干' 등의 한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1천5백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적성비가 잠을 깨는 순간이었다.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위치하던 신라는 늘 영토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신라의 방어선도 됐지만 서진, 북진을 하는데는 장애물로 작용했다. 따라서 신라는 아달라왕때 계립령(156년)과 죽령(158년)을 개척한 후 상당 기간동안 백두대간을 넘지 못했다. 신라가 그런 웅크림 끝에 백두대간을 넘어와 세운 비가 단양 적성비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죽령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 죽령 바깥쪽~고현 안쪽의 10개 군을 공취했다'고 적고 있다. 적성비는 당시 활약한 인물로 우산국을 점령했던 이사부, '국사'를 편찬한 거칠부,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 등을 적어놓고 있다. 단양 적성비가 정확히 언제…
"길도 없는 그곳에 무엇하러 가려구" "예전엔 길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사람이 안다녀서 지금은 길이 없어" "못가" "큰일나" "가다 길 잃어버려" 답사길에 만난 마을 주민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그러고는 못미더운지 혹여 길 잃어버리면 연락하라고 꼭 연락하라고 전화번호 까지 일러주신다. 나름 오랜 경험에서 오는 동물적인 감각과 남다른 지도정치 능력까지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을 어찌보고...곱상한 겉모습만 보고 앞질러가는 시골 어르신들의 잔걱정을 귓등으로 흘러보낸 채 겁도없이 대든 오지의 속내는 예기치않은 일들이 우리들을 당황케 한다. 끝을 알수없는 희미한 길을 가기에 힘센 4륜구동 차량 만큼 믿음직스러운 것은 없지만 맥없이 진창길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하고 좁고 험한 막다른 길을 만나 곡예하듯 뒷걸음으로 빠져 나오느라 진땀 흘리게 하는 뒤퉁거리로 전락하기도 한다. 산넘고 물건너 어렵게 찾아간 외딴마을엔 정작 사람은 없고 멍멍이만 왕왕대는 일 또한 오지마을의 현실이다. 개나리 봇짐에 뚜벅이 걸음만이 이동의 수단이었던 시절에서 멀리 떠나와 급속도로 변화하는 속도감에 끄들려가는 사람들의 의식 또한 붙잡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옛시절이 그
[충북일보] 청주시 현직 A구청장이 충북도 인사위원회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았다. 26일 도에 따르면 최근 감사원은 도 인사위에 청주시외버스터미널 특혜 연루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고, 인사위는 이날 위원회를 진행해 이같이 결정했다. 정직 개월 수는 3개월로, 정직 징계 수위 중 가장 높은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A구청장은 지난 2020년 청주시외버스터미널 갱신 계약 당시 담당 과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날 인사위에서는 A 구청장과 함께 당시 팀장으로 근무했던 현직 B 과장도 정직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연루자들에 대해서도 인사위는 견책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앞서 감사원은 지난 20일 정기감사 보고서를 통해 청주시외버스터미널 대부계약 부당 체결 등의 시의 위법행위를 지적했다. 이 감사 보고서는 무려 50페이지에 달하는데, 대체로 청주시외버스터미널 대부계약 부당 체결에 대한 건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핵심만 간추리자면 지난 2020년 한범덕 전 청주시장 재임 시절 시는 시외버스터미널의 대부계약 갱신이 불가능함에도 가능하다는 내용의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를 당시 터미널 운영사 관계자에게 유출해 터미널 운영사가 이 허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시 현직 A구청장이 충북도 인사위원회로부터 정직 처분을 받았다. 26일 도에 따르면 최근 감사원은 도 인사위에 청주시외버스터미널 특혜 연루자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고, 인사위는 이날 위원회를 진행해 이같이 결정했다. 정직 개월 수는 3개월로, 정직 징계 수위 중 가장 높은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A구청장은 지난 2020년 청주시외버스터미널 갱신 계약 당시 담당 과장으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날 인사위에서는 A 구청장과 함께 당시 팀장으로 근무했던 현직 B 과장도 정직 처분을 받았다. 나머지 연루자들에 대해서도 인사위는 견책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앞서 감사원은 지난 20일 정기감사 보고서를 통해 청주시외버스터미널 대부계약 부당 체결 등의 시의 위법행위를 지적했다. 이 감사 보고서는 무려 50페이지에 달하는데, 대체로 청주시외버스터미널 대부계약 부당 체결에 대한 건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핵심만 간추리자면 지난 2020년 한범덕 전 청주시장 재임 시절 시는 시외버스터미널의 대부계약 갱신이 불가능함에도 가능하다는 내용의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를 당시 터미널 운영사 관계자에게 유출해 터미널 운영사가 이 허
[충북일보] 보은군은 민선 8기 들어 최재형 군수의 군정 철학인 '군민이 행복한 도시형 농촌 보은'을 건설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정주 여건 개선, 귀농·귀촌 정책과 청년정책 추진, 휴식 공간 조성, 교육환경 확대 등 군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 사업을 펼쳤다. 군의 이러한 노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로 나타났다. 그 중심엔 공무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통해 군정을 이끌어온 최 군수가 있다. ◇ 지역 성장 동력 인구 유입 인프라 구축 민선 8기 반환점을 맞는 그는 지난 2년 동안 지역 활력 타운 조성과 농촌협약 등 인구 유입을 위한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군은 지난 5월 국토교통부에서 주관한 '2024년 지역 활력 타운 공모사업'에 선정돼 2028년까지 379억여 원을 투입해 보은읍 죽전리 일원 2만2천267㎡ 용지에 '보은 청년 all來(올래)'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군은 도시형 주거단지인 블록형 단독주택 70가구 조성, 생활 인프라와 생활 서비스 조성을 위한 커뮤니티센터 단지개발, 지역 브랜딩,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등의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역 활력 타운과 연계한 온-누림 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