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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오랜만에 바가지를 대한다. 이것을 바라보자 초가지붕에 다소곳이 피었던 박꽃이 떠오른다. 푸른 달빛 아래 피어난 순백의 박꽃은 어린 눈에도 마치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처연했다.

작년 가을, 농장에 심었던 박을 몇 개 수확했다. 그리곤 둥근 박을 잘라 속을 파냈다. 속을 파낸 박을 삼십 분 가량 삶아 겉을 긁어 그늘에 말려 바가지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가면 너른 논에 모내기를 했다. 그릇도 귀하고 더더욱 플라스틱 그릇은 꿈도 못 꿨던 당시였다. 할머니가 새참을 이고 들녘으로 나갈 때다. 일꾼들 밥을 퍼줄 그릇 대용인 바가지를 들고 외할머니 뒤를 따르곤 했다. 어린 마음에 왠지 그 일이 즐겁고 신났다. 들녘엔 흙냄새를 맡은 파란 모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었다. 논둑엔 개구리들이 큰 눈알을 굴리며 이리저리 뛰어노는 모습도 재밌었다.

논둑에 새참 바구니를 내려놓으면 잠시 허리를 핀 일꾼들이 정강이에 흙물이 잔뜩 묻은 채 밥을 먹곤 했다. 할머니는 하얀 쌀밥을 바가지 마다 듬뿍 퍼 담아 그들 손에 쥐어줬다. 그리곤 자반고등어 조림, 콩자반, 계란 찜, 무말랭이 무침, 구운 김, 농주인 막걸리를 일꾼들 앞에 내놓곤 하였다. 나또한 할머니가 바가지에 담아준 밥을 논둑에 앉아 먹노라면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 맛은 지금껏 나의 미각을 지배하고 있다.

무엇보다 외가의 밥상 위엔 종류도 다양한 나물 반찬이 오르곤 했다. 할머니가 무쳐낸 온갖 나물류의 진미는 요즘도 그 맛이 입안에 감돌 정도다. 훗날 그 비결을 물어보니 순전히 먹물같이 단내 나는 간장 맛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해 주부로서 가족들 끼니와 건강을 챙기다보니 비로소 외할머니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음식은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물질이다. 이 음식이 실은 단순히 허기진 배를 채우고 영양만을 공급하진 않았다. 더 나아가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굵직한 사건을 일으키도록 인간을 조종한 배후로도 작용했다. 이는 한 나라의 문화 및 경제의 흐름이 식문화 변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가 지은 '식탁 밑의 경제학'에 언급된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영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예는 물론 자국민까지 식민지에 이주 시켜 곡물과 소고기를 생산한다. 그리하여 미국을 유럽의 대 곡창 지역으로 삼아 신대륙과 유럽 간 무역을 최대한 지배한다"라는 계산 빠른 전략을 수립 한 후 이를 철저히 실행했기 때문이란다.

세계는 기상 악화, 기후 재난으로 향후 식량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는 어느 학자의 경고도 있다. 오죽하면 미래 인류의 식량으로 곤충을 겨냥할까. 인간은 끼니를 굶으면 레테 강을 건널 채비를 차려야 한다. 이로보아 하루 세 끼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이 인간의 심신을 지배한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한 때 공업적 대량 생산의 노하우를 음식 영역으로까지 확대 시킨 나라가 미국이다. 이 탓에 패스트푸드라는 음식의 공업화 신화를 이뤘다. 이 폐해는 실로 컸다.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이 음식을 섭취한 후 어린 나이에 당뇨병 및 성인병을 얻었잖은가.

밥상을 차리기 위해 요리를 할 때 음식 칼로리 및 영양가를 염두에 두곤 한다. 제철 채소로 반찬을 만든다. 육식보다 김치, 생선, 해조류, 나물류를 가급적 밥상 위에 자주 올린다. 사실 나물 반찬은 어쩌면 한국인만이 먹는 유일한 반찬이란 개인적 생각이다. 나물류는 다듬고 씻고 삶는 잔손이 많이 가는 음식 아닌가. 한식은 건강에 매우 유익한 음식이지만 주부의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래 가끔 반찬투정 하는 가족들 앞에서 이런 엄살을 아끼지 않는다. "음식을 요리하느라 온몸이 부서졌다"라고 말이다. 끼니 때 무심코 먹는 우리 한식은 주부의 손끝과 정성에서 빚어진다. 그러므로 비록 나물 한 접시 죽 한 그릇일지언정, 임금님 수라상을 대하는 기분으로 식사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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