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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표

수필가

나는 몰랐다.

예순세 번을 맞이하고 보냈으면서도 실체를 몰랐다. 가을, 낭만의 계절이라는 가을 말이다. 무성했던 초록이 성글어지고 바람이 선선해지면 '가을이 또 왔네.' 했을 뿐이다. 탐스럽게 핀 국화꽃으로 도시가 알록달록 색칠되면 '아, 가을이구나.' 했을 뿐이다. 그때 잠시 감상에 빠져 커피의 짙은 향을 음미하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잠시 가버린 여름을 아쉬워하면서 낭만에 젖기도 했을 것이다. 내게 예순세 번의 가을은 이런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퇴직하니 시간이 많이 생겼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친구와 일주일에 한 번씩 산책 같은 등산을 했다. 주로 것대산과 낙가산으로 갔다. 걸으며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문학을 얘기하고, 사는 얘기를 했다. 직장 다닐 때 체력단련행사의 하나로 산을 허겁지겁 오르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여유롭게 쉼을 만끽하면서. 이렇게 여름을 다 보내고 나니, 숲의 작은 몸짓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이 내뱉는 숨소리가 귀에 들렸다. 자연스레 바람이 지나가면 바람 얘기를 하고, 발 등에 스치는 풀잎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낙가산과 것대산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9월 어느 날. 그날도 친구와 나는 여느 때처럼 낙가산과 것대산으로 갔다. 한여름처럼 더웠다. 9월이면 가을인데, 가을이 왜 이리 덥냐고 투덜대며 상봉재 옹달샘에 이르렀다.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다가 문득, 한 줄기에 조르륵 매달린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예쁜데? 무슨 꽃이지?", "눈괴불주머니", "별을 뿌려놓은 것 같네. 이건?", "고마리", "작은 봉숭아 같은데, 무리 지어 피었네.", "봉숭아 닮았지? 물봉선이래", "이것들은 얼핏 보면 같은데, 자세히 보면 다르네", "그렇지? 여뀌라는 건데, 이건 개여뀌, 이건 이삭여뀌, 이건 장대여뀌", "이건 줄기에 가시가 달렸잖아, 꽃이 작아.", "그게 며느리밑씻개라는 거야. 이름을 고약하게 붙였지? 비슷한 이름을 가진 게 있어. 며느리배꼽이라고. 여기 있네." 내가 묻고, 친구가 가르쳐줬다.

용정축구공원까지 내려오는 숲길은 온통 꽃밭이었다. 슬픈 사연이 있지만 앙증맞은 개망초꽃, 꽃 모양이 비슷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개쑥부쟁이와 구절초, 지기 직전인 고들빼기꽃, 어릴 적 추억이 많은 강아지풀, 그 풀과 비슷하지만 낯선 수크령, 꽃 모양도 억척스러워 보이는 환삼, 깊은 하늘색 달개비꽃, 진한 노랑 뚱딴지꽃, 나팔꽃 닮은 메꽃, 외롭게 핀 참취꽃, 덩치 큰 까마중, 철 모르고 핀 민들레꽃, 등등.

"웬 꽃이 이렇게 많은 거야? 풀들이 다 꽃을 피우고 있잖아. 오늘 횡재했어, 이렇게 많은 꽃을 보다니. 꽃 이름도 많이 배우고."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떠는 내게 친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이 꽃을 피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지금 씨앗을 남기지 못하면 쟤들은 멸종하니까. 목숨을 건 몸부림인 거지. 어떤 생명에게는 이번 가을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까. 가을 문턱에서 피는 꽃만큼 생에 대한 의지를 선명하게 표출하는 상징이 또 있을까 싶어. 내 눈에는 저 꽃들의 화려함이 제 생명을 연료로 해서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여. 나는 말이야. 가을을 낭만의 계절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저 수 많은 꽃 하나 하나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저 꽃들에게 말이지. 그래서 나는 저들에게 최소한의 경의라도 표하고 싶어서 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준다네."

나는 예순네 번째 맞이하는 가을의 문턱에서 가을의 또 다른 의미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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