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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표

수필가·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 사무국장

나는 청주의 겨울이 싫다. 그렇다고 청주가 싫다는 건 아니다. 청주에서 나고 자란 내가 어찌 청주를 싫어하겠나. 다른 도시로 겨우 몇 시간을 나갔다가도 청주 경계선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집에 다 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나인데 말이다. 이런 내가 청주의 겨울을 싫어하게 되다니….

서울 살다가 청주로 이사 온 어느 해 겨울날이었다. 그날 나는 상당공원 인근에서 벌어진 회식 자리에서 소주를 몇 잔 걸쳐 기분이 알딸딸한 상태였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 터였다. "안수집사님, 약주 드셨네요." 차 타고 가자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사직동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40년 전 추억을 더듬으면서 걷다 보면 술에서 깰 것이고,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 선택에 동의하듯 마침 달빛도 환했다.

고개를 외투 깃 속으로 쑥 집어넣고 두 손은 주머니에 꾹 집어넣은 채 흐느적흐느적 걸었을 것이다. 취기가 오르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대로 그날도 콧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오랜만에 겨울밤거리를 혼자 걷는 낭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움츠린 어깨가 아파 고개를 빼 들고 하늘을 바라보려 했던가. 순간 나는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좀비들이 눈앞에 떡 버티고들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손목이 잘리고 팔꿈치가 잘리고 어깨가 잘리고 심지어 머리통마저 잘린 흉측한 몸뚱어리로 괴기하게 서 있었다.

이게 꿈인가, 눈 비비고 살펴봐도 분명 좀비였다. 더군다나 한 놈이 아니었다. 히죽거리는 놈, 나를 노려보는 놈, 철철 울고 있는 놈, 놈 놈 놈…. 거리는 온통 좀비들 천지였다. 술이 번쩍 깨는 것 같았다. 추억 더듬기는커녕 내 안에서 비명이 터졌다. 나를 놀라게 한 것들은 전지 당한 플라타너스들이었다.

40년 전 대학 다닐 때, 시내버스 요금을 아끼려고 개신동에서부터 상당공원까지 숱하게 걸어 다녔다. 돈보다 시간이 훨씬 많던 시절이었다. 거의 혼자였다. 혼자 걷는 40분 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보이는 사물들과 많은 대화도 했다. 그중에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넓은 이파리로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식혀준 여름에도, 이파리를 떨구고 우람한 나신(裸身)을 당당히 드러낸 겨울에도. 이후 내가 직장 때문에 타지에서 살 때도, 플라타너스는 추억 속에서 늘 친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친구들이 좀비로 변해있다니…. 40년간 간직해온 추억이 처참히 깨져버린 것이다.

그날 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에서 구토를 꺽꺽 해댔다. 뭔 일인가 싶어 잔소리도 못하고 내 주위에서 서성거리는 아내를 뒤로하고 내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옴브라 마이 푸(Ombra mai fu)'를 듣고, 듣고 또 들었다.

2003년, 독일 드레스덴엘 간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강렬하게 남아 있는 풍경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다. 2차 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반파된 건물 잔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기념관에 갔을 때였다. 기념관 앞에 초원처럼 수평으로 펼쳐진 넓은 마당, 그 마당에 유일하게 수직으로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플라타너스 한 그루(2차 세계대전 때에도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 아래 벤치 몇 개, 그 벤치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대여섯 명의 노인들과 그 주변을 뛰어다니는 꼬마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흐르는 소프라노 가수의 나지막한 노랫소리 'ombra mai fu….' 나는 거기서 생명의 존엄과 그 생명을 담고 있는 공간의 품격을 한꺼번에 보고 들었다.

그날 밤 그 사건을 겪고부터는 청주 도심의 겨울 거리가 싫어졌다. 특히 달빛이 환한 겨울밤에는 더욱더. 이런 날에는 알딸딸하게 술을 마셨어도 밤거리를 혼자 걷는 낭만 따위를 찾지 않는다. 쌩하니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와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 만다. 그리고 어김없이 'Ombra mai fu'를 듣는다. 마음이 달래어질 때까지. 청주에도 드레스덴 같은 풍경이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면서. 겨울마다 좀비가 되는 청주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애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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