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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표

수필가·충북바이오산학융합원 사무국장

2022년 12월 30일, 상근(常勤) 직장인으로 마지막 출근하는 날. 무슨 옷을 입을까 망설이던 중 옷장 깊숙한 곳에 숨긴 듯 고이 모셔져 있는 나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트렌치코트가 눈에 띄었다.

아하! 너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구나. 옛날에 우린 둘도 없는 단짝이었는데. 아내조차 우릴 보고 질투가 날 만큼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나는 네가 없으면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 했어.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너를 외면하고 살았구나. 그건 내가 변심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바뀌어서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를 멀리하는데 나만 너를 가까이하기가 쑥스럽더라고. 남들 눈에 튀어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거든.

처음 너를 만났을 그때가 내겐 참으로 좋은 때였어. 30여 년 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그때, 내게 세상은 온통 환희 그 자체였지. 여러 사람이 축하해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고, 실력이 있다고 직장 내에서 추켜세워주기까지 하니 자신감이 철철 넘쳤지. 그렇다고 두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야. 낯선 무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어렵고 두려운 일이더라고. 직장 내 주위 사람들에게 그 두려움을 내보일 수도 없었지. 왜냐하면 주위 사람들은 직장에서 처음 만나 서로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설혹 어느 정도 안다고 쳐도 그 두려움을 꺼내 보이면 그들이 나를 얕잡아볼 것 같았으니까. 겉으론 씩씩한 척 살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척 외로웠었지. 그때 널 만났고, 첫눈에 홀딱 반했던 거야. 너는 언제나 나를 포근히 감싸줬어. 외로움도 달래주고 기분도 좋게 만들어 주곤 했지. 그럴 때마다 너에게 많은 얘기를 했을 거야. 기분이 좋으면 내가 얼마나 수다스러워지는지 너는 잘 알잖아. 주로 앞으로의 직장 생활에 대한 꿈을 얘기했겠지. 국가 발전에 기여하면 좋겠노라고 했겠지. 내 이름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면 좋겠노라고 했겠지. 네게 수다를 떨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다짐하길 수없이 반복했겠지.

그런데 인생이란 것이 어디 생각대로 살아지던가? 그럴 리 없지. 낯선 무대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을 무렵부터일 거야. 순간순간에 매몰되어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아. '바빠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옛날의 그 꿈과 다짐은 새까맣게 잊고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나는 복잡한 기계의 수많은 부속품 중 하나가 돼버렸던 거지. 나를 잃어버리고 산 거야. 그나마 너를 가끔 만나기라도 했다면 옛날의 그 꿈과 다짐이 떠오르기라도 했을 텐데, 너를 만나는 일도 없어졌으니 말이야. 오늘 문득 생각해봐도 그 꿈과 다짐이 하나도 생각나질 않네.

그래, 오늘은 너와 함께하자. 30여 년 전, 인생 2막을 시작할 때 다졌던 그 초심(初心)을 나는 비록 잊었지만 너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오늘 우리 함께 그 초심을 끄집어내 되살려 보자고. 인생 3막은 인생 2막보다는 진보가 있도록 만들어야 할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60대 중반이 되도록 나이를 먹었어도 인생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거야. 2막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던 것처럼 3막도 도통 모르겠다는 거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그렇다고 이미 코앞에서 얼쩡거리는 3막을 거부할 수도 없고. 별수 없이 2막처럼 이리저리 부딪치고 깨지며 살아보는 거지 뭐. 그렇지만 3막은 2막과 다르게 살고 싶어, 정말 간절히. 말하자면 3막이 끝날 때쯤에도 3막을 시작하며 다졌던 초심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거지. 2막처럼 나를 잃어버린 채 사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코트를 걸치고 출근하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역시, 그 코트와 당신, 참 잘 어울려요. 통 안 입길래 버릴까 하다가 당신이 무척 즐겨 입던 옷인지라 안 버렸는데, 잘했네. 이렇게 멋있는 우리 남편을 다시 보다니." 직원들도 환호했다. 주윤발보다 멋있다나 뭐라나.

아내와 직원들의 과장된 호들갑이 나를 위로하려는 그들의 배려 방식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는지 그들이 알까? 인생 2막과 3막 사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의 고민과 두려움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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