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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세상사에서 잊히지 않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새해를 맞으며 지난 삶을 돌아보건대 잊을 수 없는 일들은 마음 상한 일보다 가슴을 심하게 뒤흔든 감동의 일들이 다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것들을 가슴 속에서 들추어낼 때마다 때론 추억의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콧날이 시큰하도록 깊은 감흥을 받기도 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무엇보다 삶을 사노라면 선의의 거짓에 더 감흥이 깊을 때가 있다. '선의의 거짓말'이란 낱말을 대하노라니 얼마 전 만난 친구 연희가 생각난다. 그녀와 나는 학교 동창이다. 서로 살기 바빠 그동안 가슴으론 숱하게 만났으나 얼굴을 맞대기는 몇 년 만이다. 그녀는 나를 만나자마자 기억 속에 까맣게 잊힌 어느 친구의 근황부터 수다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연희의 이야기 속 화제 주인공은 정숙이다. 그 친구 역시 학창시절 같은 반 친구로서 우리 셋은 성적에 대한 경쟁자였다. 반에서 일, 이, 삼등을 우리 셋이서 독차지 했었다. 여름 방학을 얼마 앞둔 어느 날이었다. 몇날 며칠을 학교를 결석한 정숙이가 그날도 학교를 등교하지 않았다. 그리고 학교가 파할 무렵, 먼발치서 봐도 말쑥한 정장 차림의 신사와 정숙이가 교문 앞에서 연희랑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보였다. 훗날 안 일이지만 정숙이가 갑자기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하게 돼, 그 애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오다가 교문 앞에서 연희를 만난 것이었다.

그 때 연희는 내게 정숙이에 대하여 그 날 일만 말 하였을 뿐 별다른 이야기는 더 이상 안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날의 진실을 연희는 이제야 밝히고 있다. 실은 정숙이가 당시 학교 선배들에게 돈을 정기적으로 상납하고 걸핏하면 소위 말하는 이지메를 당했단다. 견디다 못한 그 애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왜? 연희는 자신과 가장 친했던 나에게까지 숨겼을까? '싶었다. 나에게 비밀에 부친 것은 이것 뿐 만이 아니었다.

정숙이 아버지는 시각장애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학교 친구들 눈을 의식하여 지팡이도 안 짚고 정숙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부축하고 학교를 찾았단다. 그것을 눈치 채고도 연희는 정숙이에 대한 불리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제 말할 수 있다면서 몇 십 년을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정숙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연희가 참으로 남달라 보였다. 실은 정숙이는 나보다도 연희랑은 서로 성적 이,삼 등수를 넘나들며 심한 경쟁을 벌였던 사이다. 지난날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인 십대의 소녀인 연희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상대의 치부라면 치부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함구해 온 그녀 성정이 참으로 속 깊다.

연희가 비로소 털어놓는 정숙에 대한 비밀은 나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보얀 얼굴, 유난히 흰목덜미가 인상적이었던 정숙이다. 평소 단정한 옷매무새의 정숙이가 시각장애를 지닌 홀아버지와 판잣집에서 단둘이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정숙이가 학교를 결석할 때 담임 선생님께서 연희한테 정숙이네 집을 찾아가 보라는 말에 그 아이 집을 찾아갔을 때 일이란다. 연희가 그 애 집에 이르렀을 땐, 퉁퉁한 사기그릇에 노란 좁쌀 밥 한 그릇과 달랑 신 김치 한 가지를 반찬으로 놓고 점심밥을 먹더란다. 그런 사실도 이 날 연희에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연희의 말을 들으며 사람의 인품은 언행이 그 잣대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연희는 평소 입이 무겁고 또래에 비하여 매우 성숙한 사고를 지닌 친구였다. 이런 성품은 그녀를 훗날 많은 이들을 리더 하는 직업을 갖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소기업 사장이 그것이다. 흔히 '성격이 곧 운명'이란 말도 있잖은가. 이로보아 자신의 좋은 운을 얻기 위해선 노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맞는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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