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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가을비가 내린다. 너무 조용히 내려서 창문을 닫으면 비가 오는지 알 수 없다. 책장에서 뽑은 시집 속에도 비가 온다. 누군가의 기억은 다른 이의 기억과 겹치며 몽상을 향한다. 시를 읽으며 시인의 시간이 다른 시간을 낳는 걸 경험한다. 그건 꺼진 장작불 속에서 찾아낸 불티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몽상이다.



난장이 병정들은

소리도 없이 보슬비를 타고

어디서 어디서 내려오는가

시방 곱게 잠이 든

내 누이

어릴 때 걸린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못 쓰는

내 누이를

꿈결과 함께 들것에 실어

소리도 없이

아주 아늑하게

마법의 성으로 실어 가는가

─ 김명수, 「세우 細雨」전문 (시집 월식 月蝕, 민음사 1980)

비교적 짧은 시이지만 시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를 보며 화자는 비의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키 작은 병정들을 연상한다. 표면상 비가 병정들을 데리고 오지만 이미지상 '비와 난장이 병정'은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곱게 잠든 누이는'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못 쓰는' 환자다. 화자는 병정들이 걷지 못하는 누이를 '마법의 성'으로 데려가는 환상에 젖는다. 그 성에 가면 마법으로 치유한 누이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멋진 왕자와 함께 춤을 출 것 같다. 누이의 고통은 화자에게 초현실적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시 속의 환상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지만 잠시 고통을 잊게 한다. 사랑하는 이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과도 같기에 사유로 극복하고 싶은 게 아닐까. 어쩌면 세상 아픔을 모두 지우고 싶은 게 아닐까. 시 속 화자는 누이에게 '마법'이 일어나길 소망하고 마법의 치유가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동화적인 세계를 보이는 이 작품은 초현실적인 기법에 따라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사랑 부재의 시대, 시인이 풀어가는 마법이 일어날까. 시 속의 누이는 '아픈 이'를 상징한다. 돌아보면 주위에 아픈 이들이 너무 많다. 모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이다. 치열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타적 사랑뿐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 심지어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조차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러다가 따뜻함이 사라진 황폐한 세계만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에 따른 행복을 모두 얻지는 못한다. 하지만 누구든 꿈을 꿀 수 있다. 사랑을 꿈꾸는 것, 행복을 꿈꾸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다. 물리적 상황이 불가능하다 해도 정신의 자유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 의지를 가능하게 한다.

조용히 내리는 비를 보며 '구원의 병정'을 생각한 시인의 상상이 놀랍다. 시인의 소망처럼 비의 밧줄을 타고 내리는 병정들이 아픈 이들을 데리고 마법의 성으로 가면 좋겠다. 상처받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꿈을 잃어가던 이들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작은 희망이 다시 시작되는 가을비 속 마법의 성, 그것이 시인이 원하는 빛의 세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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