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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에게 부처님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옛 선사들의 법어를 통해 불탄일의 공덕을 찬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간화선의 이론과 체계를 정립한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스님은 초파일에 즈음하여 이런 법어를 읊었다.

“이 노인네 태어나면서 수선을 떨어 미친놈처럼 일곱 걸음을 걸었네. 수많은 선남선녀 눈 멀게 하고는 두 눈 뜨고 당당히 지옥으로 들어가네.”

이 정도면 찬시(讚詩)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례하고 건방지다. 제자가 어찌 스승을 이렇게 오만하게 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반어법 속에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깊이 함축하고 있다. 이른바 역설과 부정을 통해 본질을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처님처럼 이렇게 요란스럽게 태어난 이가 있던가. 어린아이가 눈 뜨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면 그야말로 미친놈에 가까운 행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신 것이다. 이런 행동을 평범한 이가 했다면 분명 정신병자 취급을 당했을 테지만 부처님이었기 때문에 그 걸음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준 위대한 발걸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자각(自覺)을 암시하는 것일 텐데 어리석은 중생의 입장에서는 미친 짓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무례를 빌려 오히려 극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눈멀게 하고는 당당히 지옥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 지옥으로 당당하게 들어갈까? 어쩌면 우리 불자들은 모두가 부처님에게 눈이 먼 사람들이다. 그 분의 가르침을 사모하여 날마다 그리워하면서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선남선녀들을 눈멀게 한 그 과보는 지옥에 떨어지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 그것이 미혹함에 눈멀게 한 죄업이겠는가. 그래서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과보로 지옥에 떨어진다면 나 또한 몇 번이고 가고 싶다.

흔히 사랑에 눈멀게 한다는 것은 사랑을 일깨워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우리를 눈멀게 한 것은 우리를 눈 뜨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멀지 않고서 어찌 진리와 깨달음을 알 수 있겠는가. 이런 표현은 연인들이 자신의 마음을 훔쳐간 대상을 ‘절도범’이라고 익살스럽게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점에서 부처님이 우리를 눈멀게 한 행동은 오히려 감사하고 존경스러운 일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송나라 때의 절조(絶照)선사의 법어 또한 여기에 뒤지지 않을 듯싶다. 그는 “갓 태어난 부처님으로 인하여 천지에 가득 번뇌를 일으켰다”며 이와 유사한 법어를 남겼다. 부처님의 탄생을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는 일대 사건으로 본 것이다. 하긴, 부처님의 탄생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 인간이 본래 부처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인가! 우리 자신들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일깨워준 폭탄선언은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반전의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탄생은 그저 단순한 일이 아니라 잔잔한 중생들의 가슴에 한바탕 바람을 일으킨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의 목적은 복(福)이나 영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존재하는 ‘부처’를 확인하는 여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대(唐代)의 선승 조주 선사는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닐까.

“목불(木佛)은 불을 건너지 못하고, 니불(泥佛)은 물을 지나가지 못하며, 철불(鐵佛)은 용광로를 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부처님이 그 어디에도 녹지 않는 참 부처일까? 이 법문의 속뜻은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바른 눈을 열어야 비로소 참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형상의 부처를 통해 내 안의 부처를 바로 보아야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을 터이다.

누가 뭐래도 불탄절 최고의 법어는 만암 치유선사의 게송일 것이다. 그는 사월초파일에 법상에 올라 법문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산호베게 위를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이여! 한 줄기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이요, 또 한줄기는 그대를 원망하는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솔직한 애증의 마음을 동시에 드러냈으며, 그래서 제대로 된 찬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알고 보면 그리움과 원망은 한 줄기다. 그러므로 부처님 오신 날에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면서 그 분을 사모하는 그리움의 눈물인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은 무한한 축복이지만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은 지극히 원망스런 고행길이라서 그랬던 것일까. 그대, 이런 눈물을 흘러보았는가? 그랬다면 진정으로 불탄절을 봉축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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