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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에 숨겨진 비밀 ⑥ 금속공예의 찬란함

철이 빚어낸 '창조의 흐름'

  • 웹출고시간2008.11.06 21:44: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한국 최초의 금속기는 기원전 700년부터 시작된 청동기라 할 수 있다. 원삼국,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각 시대마다 기형(器形)의 차이는 있지만 제작수법과 합금술에 있어 거의 변함없는 청동제품이 제작됐고 금, 은, 동, 철의 금속제 공예문화가 시대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창조적 진화를 해 왔다.
충북은 여타 장르의 공예기술보다 뛰어난 금속공예의 역량을 달성한 곳이다. 이천의 도자, 담양의 죽세품, 원주의 한지처럼 지역마다 차별화되고 특화된 공예산업이 발달해 왔지만 충북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만으로도 금속공예기술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진천 석장리, 청주 사뇌사 등 충북 문화유산에 산재해 있는 유물들을 통해 금속공예의 창조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자.

# 금속공예의 역사

인류가 처음으로 발견한 금속은 순동과 금이라 할 수 있다. 순동에 약간의 비소를 합금시켜 제작된 것이 청동이고 이를 이용해 인류생활에 유용되는 제반 용구와 무기, 의기, 장신구 등을 만들었다. 대략 신석기시대 후기(BC 5500년~4500년)인데 이때를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청동기를 제작한 것은 이집트에서 기원전 3700년쯤에 만들어졌고, 유럽은 기원전 2000년 전 부터 청동기시대에 들어갔다. 우리와 지리학적으로 관계가 깊은 중국의 화북지방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한국은 요령지방 청동기를 통해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가 외몽고로 퍼지면서 중국의 문화와 연결된 청동기문화를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금속기, 즉 청동기는 기원전 70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철기시대를 거쳐 원삼국,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각 시대마다 기형(器形)의 차이는 있으나 제작수법과 합금술에 있어 거의 변함없는 청동제품이 제작, 사용됐다. 아울러 금, 은, 동, 철의 금속제 공예문화가 시대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창조적 진화를 해 왔다.

공예문화를 낳게 한 합금술을 보면, 다른 나라의 합금술과는 달리 우선 동과 주석, 그리고 약간의 아연과 철을 합금시켜 청동을 제조했다. 제조된 자료를 양각, 음각, 입사, 주형 등의 각종 기법을 통해 문양을 만들기도 하고 도금, 칠금 등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발휘해 금속유물들을 제작, 장식했다.

삼국시대, 즉 원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청동기시대보다도 철제로 된 금속공예문화가 더욱 발달했다. 이로서 금·은제 공예뿐만 아니라 철제공예품에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금·은 상감기법을 사용한 것이 주목되고 있다.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이르러 제작된 금속공예품은 화려하고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장신구류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지니면서도 각국의 특색을 갖고 있다. 또한 원래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전통과 습성, 그리고 신앙의 뿌리와 귀태가 깊이 박혀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울러 서역적인 요소의 기법과 공예품이 나타났고 기원 4세기에 유입되는 불교전래 이후의 불구류에서는 창의성과 비례의 미, 조화의 묘미 등이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공예를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특색을 나타내, 조화의 묘미와 비례의 미를 지닌 정교한 수법과 독창적인 기법을 발휘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특하고 뛰어난 미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에 따라 불교적인 영향에서 정교하고 치밀하게 발전했던 금속공예술이 점차 퇴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왕조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한국적 성격이 뚜렷이 발흥되고, 미적으로 세련된 것은 아니나 귀족과 양반계급, 또한 불교의 미적제한이 없어진데서부터 생기는 잠재적이고도 소박한 미의식이 단순 간결한 금속공예품들을 대두케 했다. 이와 같은 신선하고 참신 소박한 미의식은 통일신라 및 고려와 대비되는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한국 금속공예의 유형

우리나라의 금속공예는 기능별로 크게 구분해 주물, 방짜유기, 금·은입사(入絲), 상감(象嵌), 판금(板金), 금속조각, 누금세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금·은입사공예는 철기(鐵器)나 동기(銅器) 등의 금속 표면에 선(線)이나 면(面)으로 홈을 파고, 여기에 다른 금속을 박아 넣은 것으로 상감기법의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입사란 명칭은 좁은 의미로는 금속의 가는 실선을 끼워 넣는다는 뜻으로, 금속선을 입사하는 방법으로부터 발전한 여러 기법들을 총칭하는 대표 용어이다.

금속조각은 재래의 은장, 섭장의 기능을 지칭한다. 주로 금, 음의 기물이나 장신구의 표면 의장을 위해 미세한 정으로 새기고 다져내고, 또는 홈을 판 자리에 금선, 은선, 오동선 등을 감입시켜 갖가지 무늬를 놓는 전통적 조이질 기법을 말한다.

장도는 칼집 있는 작은 칼로, 반가(班家)의 성인이면 누구나 허리띠나 주머니끈에 매달아 일상적인 소지품으로 휴대하는데, 이것은 한국인의 오랜 습속이다. 또한 한국의 가정에서는 유기, 즉 놋쇠로 만든 그릇들을 많이 쓰는 편이다. 동합금의 주종을 이루는 놋쇠는 두 가지가 있다. 구리에 아연을 넣은 주동과 아연 대신 석(錫)을 넣은 향동(響胴)으로 구분되지만, 아연과 석을 섞어 넣어 합금할 때도 적지 않다. 구리와 석합금의 향동은 상질(上質)의 놋쇠로 방짜라 별칭한다.

기사제공:디트뉴스24(http://www.dtnews24.com/)
# 충북의 금속공예

△진천 석장리와 종박물관


충북의 금속공예는 여타 장르의 공예기술보다 뛰어난 역량과 인류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천의 도자, 담양의 죽세품, 원주의 한지처럼 지역마다 차별화되고 특화된 공예산업이 발달해 왔는데 충북은 금속공예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온 곳이다.

진천 석장리의 철기문화, 청주 사뇌사 일원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에 이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만으로도 금속공예기술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된 제철유적으로서 제련·용해·단야 등 철 원료로부터 철을 생산해 철기를 제작하기까지 일련의 공정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은 진천군 석장리(石帳里) 유적뿐이다. 석장리 유적에서는 제련로로서 서구의 bowl furnace(원형수혈로)와 같은 원형수혈로(圓形竪穴爐)와 함께 상형로(箱形爐)도 발견돼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철원료로서 철광석 뿐 만 아니라 사철(沙鐵)과 같은 종류의 것도 사용했음이 밝혀졌고 철·철기생산과 관련된 일련의 공정이 일정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해졌다. 이 유적의 상한연대는 3세기 말경까지 올라가리라 추측하고 있다.

현재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에는 진천종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철기문화의 역사적 가치를 종박물관으로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됐다. 이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주철장 원광식씨가 인근에서 '주종소'를 운영하면서 한국의 종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심장기능을 하고 있다. 주종소란 종을 주조하는 곳을 의미한다. 오래전부터 대형종은 그 사찰의 한 켠에서 주종소를 두고 제작했다고 한다. 종을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힘든 작업이며 종교적 신비까지 내포돼 있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종은 복잡하고 긴 과정의 기다림 끝에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한국의 종이다. 한국의 종은 밀랍주조방법과 사형주조방법 두 가지가 있는데 원씨는 이 두 가지의 기법을 동시에 소화하면서 국내 최고의 주철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청주 사뇌사의 금속공예

1993년 10월 용화사에서 100여m 정도 떨어진 무심천변의 제방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전주를 이설하던 중 고려시대의 일괄 유물이 다량 발견되면서 주목된 절이다. 이들 유물들은 대형의 금동관배편을 위시해 범종, 향로, 촛대, 금강령, 주자 등 다양한데 사찰에서 직접 쓰던 것이다. 모두 378점의 유물이 발견됐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다.

사뇌사에 관한 기록은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에 진각국사가 사뇌사에서 하안거(夏安居)했다는 내용이 발견되면서 고려시대 청주에 있던 또 하나의 대찰로 여겨진다. 분명한 것은 청주 사뇌사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 중 상당수가 금속공예품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흥덕사에서는 금속활자를 간행했기 때문에 당시 청주지역은 금속공예로 왕성한 부흥기였을 것이다. 실용미학과 금속공예의 랑데부는 창조적 진화라는 시대정신을 낳게 된다.

△흥덕사와 직지

우리 인류는 수만 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문화사적으로 네 차례의 큰 변혁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그 변혁의 요소로 말과 문자, 그리고 인쇄술과 뉴미디어를 들고 있다.

인류는 말을 하면서 수렵사회를 이뤘고 문자를 만들면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기록해 농경사회를 형성했다. 보다 구체적인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활자를 만들면서부터는 인쇄술을 발달시켰고 다량의 출판물을 신속하게 생산하는 등 산업사회를 이끌어 왔다. 최근에는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보혁명, 즉 뉴미디어가 변혁의 주인공이 돼 인류문화를 급속도로 혁신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청주는 인류사적으로 큰 변혁의 주체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간행(1377년)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금속활자 발명의 창의성과 혁신성은 인간의 다양한 생각과 움직임, 그리고 인류의 변화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며 새로운 문화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인쇄술과 뉴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최첨단 반도체기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현대문명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직지의 가치에서부터 비롯됐다.

우리는 직지의 창조적 가치와 정신을 새로운 문화코드로 발전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세계 각국의 인쇄문화를 한눈에 보고 느끼고 학습하며 공유할 수 있는 인쇄문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의 문자, 세계의 활자, 문자와 활자의 변천사 및 기록문화의 아카이브를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시대정신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색다른 멋과 맛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 금속활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 활자를 하나씩 뽑아, 면별로 활판을 짜고, 한 장 한 장 탁본을 찍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깊고 느림의 미학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따라서 옛날 책의 느낌을 복원하고 아날로그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고인쇄공방이 조성될 필요성이 있다. 산업화 된 출판공간과 디자인공간을 보여주고 미래의 인쇄문화를 연구·개발·학습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청주시민의 직지사랑은 맹목적이고 헌신적이다. 직지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직지를 뛰어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이 도시와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록될 수 있는 숭고한 가치는 무엇인지 아직 고민해야 될 부분이 많지만 우리의 생각, 느낌, 열정, 창의력을 담을 수 있는 통 큰 그릇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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