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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록

한국교통대 중국어전공교수

우리는 요즘 매월 첫째 금요일을 소설 ≪삼국지≫와 함께 아침을 열고 있다. 아침을 열기에 상큼한 소재는 아니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될 듯하다. 219년에 유비는 한중왕에 오른 뒤 문무관원들에게 작위를 내린다. 이때 관우는 전장군에 제수 되었으나, 이어서 황충이라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반열인 후장군에 임명하였다는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내면서 "대장부는 결코 노병과 같은 반열에 서지 않는다!"라는 말을 내뱉었고, 심지어 유비가 내린 작위까지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런데 이 대목은 ≪삼국지≫의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점잖은 관우가 갑자기 자존심 내세우며 버럭하는 것도 낯설지만, 독자들에겐 적벽대전 직후에 관우와 황충이 장사성에서 이미 크게 한 번 결투를 벌인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때 관우와 황충은 흔히 말해서 사나이답게 서로 한 번씩 죽을 고비에서 살려주는 멋진 일대일 대결을 벌여, ≪삼국지≫에서도 손꼽히는 감동적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런데 독자도 기억하는 것을 관우는 왜 그새 까먹었을까? 이것은 역으로 애당초 관우와 황충의 결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정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그때 황충은 장사성이 아니라 그 속현인 유현이란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시 형주가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유현도 행정체계상 조조의 지휘를 받는 곳이었다. 그래서 황충은 조조를 따르느니 스스로 유비군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만약 관우가 황충을 봤다면, 그저 그런 노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관우가 평소 자존심이 강했음은 이미 소문이 났던 것 같다. 정사 ≪삼국지≫를 보면 관우가 이처럼 황충을 무시하며 화를 내리란 것은 제갈량이나 유비도 예측할 수 있었던 일이며, 그래서 유비는 여기에 대해 대책을 세워두었을 정도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관우는 마초가 유비군에 합류하였다는 말을 듣자 제갈량에게 서신을 써서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이때 제갈량은 마초에 대해 가득 칭찬을 한 다음, 장비와 나란한 정도가 되지만 그래도 관우에게는 미칠 바가 못 된다고 회신 하였다. 관우는 이것을 읽고는 흡족해하며 손님이나 휘하 장수들에게 돌려 읽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동오의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켜 사돈 맺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관우는 한바탕 욕을 퍼붓고 사신을 쫓아 보냈는데, 이로 인해 동오측에 결정적으로 원한을 사게 되었다. 그 직후 관우는 번성 공격에 나서는데 위나라 부대를 연전연파 하면서 번성 함락을 눈앞에 두는 듯했으나, 동오측에서 관우의 후방을 치는 바람에 결국 관우는 맥성에서 고립되었다가 탈출에 실패하여 사망하게 된다. 만약 관우가 조금만 더 정치적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이상의 내용은 정사에 근거했으므로 나름 팩트라 할 수 있는데 이제 추정을 말하자면, 관우가 이렇게 강하게 자존감을 내세운 것에는 나이의 문제도 있었지 않을까 싶다. 관우는 당대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론 평생 쫓겨 다니는 과정이었으니, 예순이 다 되어서도 역적을 토벌하여 천하를 편안케 한다는 대의에 있어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능력이 있음에도 좀 더 장기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없었던 조급한 마음이 자존감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나이는 숫자일 뿐이긴 하지만, 좀 더 많은 미래가 있을수록 좀 더 여유가 생길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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