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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일제에 저항한 '17살 소년' 윤병운 열사

윤 열사, 징역형 받고 1개월여간 옥고
17세 나이로 형무소서 순국, 2018년 애국장 추서
신진당 조직… 총독 저격 모의 혐의로 체포
작고한지 74년 만에 유공자로 인정받아

  • 웹출고시간2024.02.28 18:03:44
  • 최종수정2024.02.28 18:03:44

10대의 어린나이에 비밀결사조직을 창설해 항일 운동을 한 故 윤병운 열사의 동생인 윤병록씨가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생가 마을에서 윤 열사의 건국훈장애국장 증서를 들고 항일 투쟁업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김용수기자
[충북일보] "나는 일본의 신민이 아니고 조선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나를 재판 할 권한이 없으며, 조선인이 조선 독립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1942년 겨울 대전지방법원.

조선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한 소년이 재판장을 향해 이같이 소리쳤다.

그의 몸은 이미 고문을 받은 흔적으로 만신창이였지만, 결의에 찬 그의 표정에는 한 치의 후회도 없어 보였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그는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와 반성문만 제출하면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조선 독립의 뜻을 밝혔다.

소년의 당당한 태도에 분노한 재판부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단기 2년에 장기 4년 형을 선고했고, 그를 인천형무소에 수감시켰다.

10대의 어린나이에 비밀결사조직을 창설해 항일 운동을 한 故 윤병운 열사의 성남고등학교 명예졸업장.

ⓒ 김용수기자
하지만 그는 옥살이 중에도 항일 정신을 버리지 않았고, 단식투쟁을 이어나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로 인해 옥중에서 고문을 받게 된 그는 결국 1944년 4월 21일 조국 광복을 1여 년 앞두고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꽃다운 열일곱 때다.

갖은 고초를 겪으며 순국하기 전까지 조선 독립을 외쳤던 이 소년의 이름은 윤병운 열사다.

남동생 윤병록(71)씨는 "당시 시신을 넘겨받은 아버지께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형님의 야윈 모습을 보고 눈물을 보이셨다"며 "이별의 아픔을 떼기도 전 시신을 화장해 한강에 뿌리라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형님의 모습은 흔적조차 남지 않아 원통하다"고 설명했다.

윤 열사의 삶은 거부와 저항으로 대변된다.

1927년 4월 21일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의감이 강했다.

그는 옥산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부터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자율소년단을 조직하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윤 열사는 1941년 홀로 서울에 상경했다.

일제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더 넓은 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서울 성남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일찍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당시 같은 재학생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던 김덕균, 박병수, 박원배, 박성호, 박병양, 이종복, 이학연 열사와 학생 독립단체인 '신진당'을 조직했다.

그는 방학이 되면 고향 후배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태극기 만들어주며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불어넣기도 했다.

10대의 어린나이에 비밀결사조직을 창설해 항일 운동을 한 故 윤병운 열사의 동생인 윤병록씨(오른쪽)와 류윤걸 광복회 충북도지부 지부장(가운데) 등이 윤 열사의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장동리 생가를 둘러보며 항일 투쟁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용수기자
1942년 일본이 조선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여성들을 군 위안부로 강제 징집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 윤 열사는 신진당 구성원들과 조선 총독 미나미 치로 저격을 모의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밀고자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 같은 해 12월 윤 열사가 고향에 내려와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 경시국은 형사들을 보내 그를 체포했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윤 열사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형사들에게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도 전해진다.

10대의 어린나이에 비밀결사조직을 창설해 항일 운동을 한 故 윤병운 열사의 건국훈장애국장 .

ⓒ 김용수기자
그렇게 압송된 윤 열사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뒤 광복이 이뤄졌고, 그의 의로운 삶은 잊혀져 갔다.

윤 열사가 다른 열사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살아생전 그의 기록이 6·25전쟁 등에 의해 대부분 소실됐기 때문이다.

그간 유가족과 후배들은 그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윤병록씨는 "형님의 기록을 찾기 위해 수년간 청주시, 보훈지청, 인천교도소, 법원 등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며 "故박걸순 충북대 명예교수가 신진당을 연구하고 이를 학계에 알리면서 잊혀진 형님의 업적이 더 수면위로 드러나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2018년 8월 15일 광복절 73주년을 맞아 윤 열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작고한 지 무려 74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2021년 1월 6일 서울성남고등학교는 79회 졸업식을 통해 윤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업적을 이뤘음에도 윤 열사는 3·1절, 광복절 등 보훈 관련 행사에 여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윤병록씨는 "형님은 현재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정책에 항거한 날을 기념하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도 추서 받지 못하고있다"며 "형님의 업적이 역사 속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하소연했다.

이어 "지자체는 윤병운 열사가 유관순 열사와 같은 순국열사인 것을 잊지 말아 달라"며 "도민들께서도 70 년전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윤병운 열사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 임성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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