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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11.30 14:12:29
  • 최종수정2023.11.30 14:12:29

박영록

한국교통대 중국어전공교수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액션 영화 『열 세 번째 전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Draw sounds? Yes, I can draw sounds… and I can speak them back. (소리를 그리냐고? 그래, 나는 소리를 그릴 수 있지. 그리고 난 그것을 다시 말로 되돌려 줄 수 있어.)" 여기에서 '문자'를 '소리를 그린다'고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다만 이때 '소리'는 인간의 말소리, 그것도 해당 언어의 말소리이지 동물이나 자연계의 소리, 나아가 외국어 말소리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인지가 『훈민정음해례』의 서문에서 훈민정음에 대해 "바람소리, 학울음소리, 닭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적을 수 있다"고 쓴 바람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이것이 한글의 특장점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랫동안 문자가 없었던 우리 상황을 언급한 것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정인지 서문의 이 부분은 남송시대 정초(鄭樵)라는 사람이 쓴 『칠음략(七音略)』의 서문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중국은 한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한자는 '소리'를 나타내는 기능은 대단히 취약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 인도에서 불교와 함께 언어학 이론이 들어오면서 인간의 말소리라는 것이 음소로 나눌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라도 알만한 쉬운 한자를 이용하여 소리를 조합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우리가 볼 때는 지극히 불편한 방법이지만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쾌거였다. 그래서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는 기쁨을 표현하여 "학울음, 바람소리, 닭울음, 개 짖는 소리, 뇌성벽력이 하늘을 놀래키는 소리, 모기가 귀 옆을 지나가는 소리도 모두 옮겨 적을 수 있으니 하물며 사람의 소리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모든 문자는 학 울음은 물론이고 모국어도 100% 표기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한글도 한국어의 '뒤바뀌었다'를 빨리 읽었을 때 발생하는 발음은 표기할 수 없으므로 '뒤바꼈다'로 절충하여 표기하는 식이다. 또, 현재까지의 사용법을 전제로 할 때, 한글은 이중모음이 올 경우 상하→좌우의 순서로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어'을 합치면 '워'가 되지만 '어우'는 합칠 수 없어서 '어우'로 쓸 수밖에 없다. 꼭 필요하다면 새로운 표기법을 개발할 수는 있겠지만. 이상의 말은 한글이 단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본질은 해당 언어를 표기하는 약속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수 있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한글은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우리의 자산임은 사실이다. 문제는 한글이 바람소리까지 표기할 수 있다는 믿음에 도취되어 한글로 외국어를 어떻게 표기할지에만 관심을 갖지 정작 한글로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는 점이다. 중국 여행지의 안내푯말은 대체로 '한자(중국어)-영어-한국어'의 세 언어가 기본인데, 안내소에는 '咨詢處-information-인포메이션'이라 써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information'은 영어인데 '인포메이션'은 한국어라는 점이 안타깝다. 한글의 본질은 한국어를 적는 것인데, 지금처럼 나아가다간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좋은 말은 죄다 외래어를 쓰고 한국어는 욕만 남는 것이 아닐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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