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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술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대상이라는 울타리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사르트르는 인식 없는 존재를 '즉자=사물'로, 다른 것들과 관계 맺으면서 자기 스스로 깨달아 자기 자신과 맞서거나 버티며, 인식을 갖게 되는 존재를 '대자=인간존재'로 정의한다.

또한 제3 영역에 있는 '대타존재=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타자개념은 삶에 대한 가치를 높여주며, 살아 있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여 '나'라는 존재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든다.

타자는 '바라봄'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본다는 것은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형상들이 빛에 의해 반사되고 이를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인식되었을 때 가능하다.

'바라봄'에는 눈이 가는 길인 눈길이 있다. 이 눈길에는 의미 없이 스쳐가는 시선(eye)과, 한곳에 집중하여 오랫동안 머무르며 바라보는 응시(gaze)가 있다. 사르트르는 타자와 나에 대한 관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시선(Regard)이라고 본다.

내가 존재하면 타자도 나와 같은 조건으로 존재하는 주체이며, 대등한 두 주체를 중립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시선이라고 본 것이다. 즉, 타자와 나는 동등한 주체이기 때문에 두 주체가 서로 친밀성을 갖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중심에서 필연적으로 떨어져나가게 된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세계에 타자 세계가 조금씩 들어서게 된다는 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가 타인의 세계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게 됨을 말한다. 때문에 사르트르는 어느 날 자신 앞에 나타난 타자 정체성을 단일한 주체인 고유한 나만의 세계 속에 생긴 '갈라져 터진 작은 틈' '내출혈' '배수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타자와 만남은 내면세계가 빠져나가는 것이고, 타자 세계가 나에게로 흘러들어 오는 것이다. 문제는 타자가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응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타자 시선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 고유한 세계는 내출혈에 빠지고, 이 뇌출혈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고유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는 타자에 의해 해체되어 주체가 아니라 나는 객체로 뒤바뀌고 만다. 더 큰 무서움은 타자에 의해 응시당한 내 존재는 나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나로 바뀌어 있다는데 있다.

이는 '어떤 무게인지 그것이 누구 짐인지 모른 채 짊어지는 짊'으로 나를 지배하게 됨에서 알 수 있다. 바라보는 응시는 힘이요 권력이다. 응시하는 종착점은 모든 것들을 객체로 포획해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응시하는 시선을 사이에 두고 나와 타자가 쉼 없는 밀당을 하면서 혼란과 혼동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나를 응시하는 타자는 '상승'을 응시 당하는 나는 '추락'을 경험하는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이가 일상화 되면 내면화된 타자의 시선을 타자가 없는 순간에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된다. 주체라 하지만 홀로 올바르게 서 있을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진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때문에 나에게 존재 근거를 아주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만들어준 대상 출현은 매우 중요하다. 그 대상은 단순한 타자를 넘어선 내 '외부' '비밀' '본성'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는 고유한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대상이라는 타자가 전해주는 실존에 대한 본질을 내재화(동화assimilation)시켜야 한다. 대상을 앵글을 통해 정지시켜 되돌아보고 바라보는 행위는 객체로 추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삶에 대한 의지가 자유로움 속에서 가치를 획득하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재화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내재화는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단어로 정리된다. 촬영 장비를 들고 동해로 떠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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