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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술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70년대 아버지는 중앙일간지 지방 주재기자로 일하던 중 정부 양곡보관창고에서 나락을 무단방출 한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섰다가 오히려 뇌물수수 혐의로 6개월여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다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화병과 지명으로 45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의롭고, 불의를 묵과하지 않으신 분으로 주변사람들로부터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철 들어서 알았다. 주재기자를 하시는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과 접할 수 있었다. 새벽에 도착하는 잉크냄새 가시지 않은 신문을 마주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나 또한 아버지 유전자를 받았는지 반듯하게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아왔다. 군 복무시절 계엄령 상황에서 광주 5·18 진압군 투입 문제로 항명하여 헌병대에 잡혀가 3개월여 고초를 겪었다. 그 충격은 오늘까지 이어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현실 도피라 할까? 문학과 음악 그리고 인문학이 배고파 슬픔을 공부하면서 재물과 거리 두고 살아왔다. 가난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을 안겨주었다. 아버지도 가난했지만 나 또한 가난하게 살아왔다. 있다면 문학과 음악, 인문학에 대한 결핍,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뜨거운 지적 탐구심이다.

우연한 조우에서 "많은 ★들 중 그리운 이름 하나 들어 있어 가만히 불러본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김현주 시인 『꽃살문에 앉은 바람』(문예바다) 산문집을 통해 봄에는 봄꽃, 여름에는 푸른 이파리, 가을엔 낙엽과 바람, 그리고 겨울엔 바위 위 이끼까지 삼라만상 모든 것을 내면에 새겨 독특한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출발과 눈뜸을 봤기 때문이다.

내가 그랬듯 시인은 가난하여 책을 사서 볼 수 없었다 한다. 길을 걷다 간혹 찢어져 뒹구는 신문을 기워 맞춰 읽으면서 문장을 만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을 만든 8할은 찢어진 신문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좋은 언어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꽃살문에 앉은 바람』 산문집 낭송회에 참석하여 김현주 시인을 처음 봤다. 마음이 든든해야 세상이 보인다했듯 김현주 시인은 여리지만 당차보였으며, 응시하는 눈빛은 초롱 했다. 이로보아 마음이 든든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너무 오래 서 있었다./ 너무 오래 길에 세워 두었다. 나는 나를 멀찍이 세워 두고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그 길 나는 늘 거기 있었으나,/ 온전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팠다.(- 산문집 작가 말 중에서)

찰나에만 현현했던 나는 순간 숨을 멈추어야했다. 숨을 참으며 산문집을 읽어나갔다. 숨을 참는다는 것은 칠정이 모두 들어있어, 이 글쓰기가 생사를 건 고해였음이 보였기 때문에 함부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마 장엄한 화엄 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절집 여행 중 꽃살 가득한 어느 절집 문이 눈에 들어왔기에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시인은 언어나 문자로 자신이 인식한 세계를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SNS에서 문자로 말을 하고 책으로 문자를 기록한 『꽃살문에 앉은 바람』 첫 장에 "많은 ★들 중에 그리운 이름 하나 들어 있다 가만히 불러본다"고 친필로 써 주었다. 그리고 붉은 단풍을 덤으로 준비한 여유는 마음이 든든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좋은 날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유튜브에 올리기 위해 편집 중이다. 굽이치는 실수와 후회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한 때이고 과정일 뿐인데 괴로움도 즐거움도 집착할 것 없다는 생각으로 잘 살고 싶은 하루가 벌써 오후로 접어들었다.

공간경계를 글과 영상으로 인연 지으며, 『꽃살문에 앉은 바람』 산문집이 올 겨울 따뜻한 목도리가 되어 줄 것 같이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꽃살문으로 거처를 옮긴 시인이 흘린 눈물, 비취빛으로 빛나는 관음사 대웅전 청기와 틈에 눈물이 이끼로 피어나 합장하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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