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많음동두천 9.0℃
  • 맑음강릉 11.6℃
  • 구름조금서울 10.9℃
  • 흐림충주 8.5℃
  • 맑음서산 10.2℃
  • 흐림청주 11.5℃
  • 구름조금대전 9.8℃
  • 구름많음추풍령 10.0℃
  • 맑음대구 8.7℃
  • 맑음울산 8.6℃
  • 맑음광주 9.7℃
  • 맑음부산 12.0℃
  • 맑음고창 6.3℃
  • 구름많음홍성(예) 12.7℃
  • 구름조금제주 14.2℃
  • 구름조금고산 13.8℃
  • 구름조금강화 9.9℃
  • 구름많음제천 5.8℃
  • 구름많음보은 8.3℃
  • 흐림천안 9.4℃
  • 맑음보령 11.7℃
  • 맑음부여 5.4℃
  • 맑음금산 8.8℃
  • 맑음강진군 7.9℃
  • 맑음경주시 5.4℃
  • 맑음거제 9.8℃
기상청 제공

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정희

수필가

지붕난간으로 잘 마른 호박고지가 정갈하다. 오늘 아침 서너 통을 켜서 난간이 빽빽하도록 널었다. 저녁이 되자 꾸덕꾸덕 마른 게 한 방구리 남짓으로 줄었다. 이 정도로 볕이 사나흘만 좋으면 진종일 까놓은 도라지도 봉투 한 장에 들어간다. 토란대 베어다가 대충 저며 널어도 하루 이틀이면 절반 부피밖에 되지 않는다.

말릴 때마다 칙칙해지기 쉬운 고구마 줄기도 이맘때는 90% 성공이다. 배배 틀어지도록 마를 때는 질겨서 먹기가 나쁘다. 지분지분 마르면 군내가 나고 물컹거리는데 물기만 살짝 걷어내는 가을바람 때문에 서서히 마르면서 부드러워진다. 물 삘 동안의 변화치고는 놀라운 현상이다.

둔덕의 잡초도 한껏 조신해 보인다. 여름내 뻣뻣한 게 왈패 같더니 오늘만큼은 씨앗을 단 채 숙이고 있다. 하다못해 잡초까지도 얌전하게 만드는 이미지가 새삼스럽다. 나무도 무성했던 녹음은 간데없이 물기를 내린 채 익힘을 준비한다. 물기란 물기는 모두 마르고 눈앞이 탁 트일 만치 시원해지면서 빈자리를 만들었던 것.

그래서 가을인 걸까. 곡식이든 푸성귀든 말리는 게 일이었다. 어릴 적 마당에 있으면 콩멍석이야 깻단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갈수록 벌어져 가르맛길이 생기고 개미와 땅강아지가 오글오글 헤집고 다녔다. 여름내 벌창하던 냇물도 참빗질이나 한 듯 비좁아 보였다. 따끈한 갈볕에 줄어들기도 하겠지만 느낌이 그랬다. 둔덕에도 억새니, 갈대니 잔뜩 우거졌는데 바람만 불면 머리카락을 헤집은 듯 훤히 드러나곤 했다.

가을이면 나도 옷 입을 때마다 할랑한 느낌이었다. 살이 빠지고 품이 준 것 같아도 기본 치수는 똑같다. 단지 등짝이며 어깨가 허룩한 느낌이다. 얼핏 키도 작아 보여서 속상할 때가 있지만 새들새들해지는 그게 겨울나기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애호박은 겨울을 나지 못해도 켜서 말린 고지는 묵나물이 된다. 천변의 갈대 역시 물을 내리지 않으면 살풍경하게 보인다. 다행히도 물을 내리면서 유유자적 흔들리곤 했으니 볼수록 풍경이다.

나 역시 앙상한 체질이라 까칠해 보인 것뿐이다. 그나마도 일시적인 게, 가으내 말려 둔 푸성귀도 삶거나 불린 뒤 보면 처음 분량이 나온다. 곡식도 마르면서 옹골차다. 타작할 때는 농부들도 우정 늦추는 걸 보았다. 오죽해서 가을일은 게으른 사람이 더 잘한다고까지 칭찬이다. 부지런한 건 좋지만 익힘은 바싹 말리는 게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딱히 흐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 이상 차일피일하면서 더 바싹 마른다. 그래서 줄어들지언정 밥을 안치면 햅쌀보다 곱으로 늘어난다. 햅쌀은 햅쌀대로 맛있지만, 겨우내 먹을 저장용 쌀은 바싹 말려야 좋다. 새들새들해지고 꾸덕꾸덕해지면서 치명타가 될 삶의 동파를 막는다. 부피는 줄었어도 엑기스로 바뀌었다.

저물어가는 시월, 단풍이 드는 것도 물 삐는 동안이었다. 나무가 자체 내의 수분을 내리면서 고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찬 이슬 맞은 단풍에 꽃까지 피어난 듯 금상첨화다. 꽃도 이슬비가 내리면 진주를 아로새긴 듯 예쁘다. 단풍에 올라앉은 이슬도 비단 위에 꽃이라고 하면 좋겠다.

어느 때 보면 불붙는 산이었다. 불 못이 쏟아지는 것도 같다. 데기나 한 것처럼 검붉은 자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초록이 타오르고 얼마나 많은 가랑비가 흩뿌렸는지 알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을비가 그친 뒤, 꾸역꾸역 연기 피는 풍경이 재현될 리가 없지. 꽃보다 고운 게 단풍이지만, 물기가 남아 있으면 필경은 얼어 죽는다.

우리도 아름다운 말년을 위해서는 가진 것 모두를 내려놓아야 하리. 천하의 가을은 단풍으로 결정되고 그 단풍은 물기를 얼마나 덜어내느냐로 결정되는 것처럼 그렇게. 딱히 겨울이 아니어도 단풍이 고우려면 방법은 딱 하나 아낌없이 내려놓는 거다. 남은 물기로 단풍의 농도가 결정되듯 욕심과 명예 때문에 내려놓지 못한 게 있으면 지금도 늦지 않다.

단풍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가는 진원지를 찾아가 본다. 단풍의 미덕과 비움의 미덕은 바늘과 실처럼 간다. 나무가 자랄 동안은 지루할 만치 걸리는데 물기를 내려놓는 훈련 역시 만만치 않다. 이파리와 가지를 늘리는 것은 의지와 열정이지만 꽃보다 고운 단풍 내력은 자기성찰로써만 가능하다.

눈을 들면 붉은 물 튄다고 꽃대님 채우던 산자락이 보인다. 노을을 보는 느낌이다. 눈감으면 마구 마구잡이로 달려오던 꽃노을. 갑자기 서쪽 하늘 꽃 사태에 놀라곤 했었지. 산 첩첩 골짝마다 흥건할 때는 노을강이다. 해 설핏해지면 철썩철썩 물보라가 기슭을 헤집는다. 물 내리면서 처절하게 고운 속내를 보는 듯하다.

단풍이 드는 게 까닭이 있듯이 우리도 가진 걸 내려놓는 그때부터 나름 전성기에 초록의 영광을 누린다. 가혹한 운명도 우리를 보다 인간적이게 했다. 서리가 내려도 해가 뜨면 저절로 말라 선명해지듯 때가 되면 해결되는 삶인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동동거린다. 가물 때 꽃이 예쁘듯 여건조차 그리 바뀌는 거라면 시련도 문제 삼을 건 아니다.

초록에 겨워 단풍이 되고 단풍에 겨워 낙엽이 된들 슬퍼할 것은 없다. 나는 과연 얼마나 활활 타는 인생인지를 돌아볼 수 있으면 찬 서리에 빛나는 단풍 메시지로 충분하지 않을까. 박고지 호박고지도 물 삘 동안에 저장용 채소가 되는 것처럼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서 원숙해지는 인생을 추구해 본다. 서리 단풍 준비하는 계절의 들머리에서.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