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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충북일보] 묵정밭에 민들레가 피었다. 군데군데 오랑캐꽃도 다보록 피었다. 여느 때라면 잡초투성이 밭이었는데 눈길을 끌 때가 있구나!

묵정밭은 오랜 날 버려둔 땅이다. 다르게는 '묵밭'이라고도 하는데 농사를 짓다 보면 갈수록 산성화된다. 얼마나 묵혀 뒀는지 무성하게 올라온 풀은 보기만 해도 을씨년스럽다. 그러던 것이 몇 해 전부터 봄꽃이 어우러지곤 했다. 냉이꽃으로 뒤덮일 때는 자그마한 유채꽃밭처럼 화려했다. 한여름 쌀뜨물처럼 뿌옇게 피는 망초꽃도 잔잔한 안개꽃이다. 말 그대로 묵혀둔 밭이었건만……

오래 된 밭을 묵정밭이라고 할 때는 황폐한 느낌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친근하다. 떠나 온 고향 마을의 느티나무 또는 뒷산의 해묵은 소나무를 생각하는 기분이다. 술하고 친구가 오래 될수록 좋다는 건 흔한 얘기였으나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는 않는 것 같다.

닳고 해져서 볼품없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정이 가고 끈끈하다. 버리려도 버릴 수 없는 그것들은 오래된 만치 정이 들었다. 손때가 묻고 정이 들면서 어쩐지 더 예쁘고 정겹게 다가온다면 그만치 깊은 연륜과 정을 드러낸다. 세상에는 오래 될수록 좋은 것도 간혹 있다.

이따금 묵혀 둔 추억의 잡동사니를 꺼내 본다. 알아볼 수도 없이 퇴색해 버린 것도 있고 미소를 짓게 되는 기억도 많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아름답게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슬픈 기억도 묵은 세월에 투영되면서 추억으로 바뀐다. 해묵은 동굴 바위틈에 핀 물망초가 훨씬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처럼 그렇게.

저녁에는 고등어조림을 했다. 이태 전에 담근 묵은지를 깔고 고등어에 양념을 끼얹은 뒤 불에 올렸다. 칼칼한 김치 맛과 어우러진 고등어 맛이 깔끔하다. 나른해지기 쉬운 봄날에 입맛을 돋워 준 것일까. 만두를 해 먹을 때도 묵은지가 맛있다. 덜 익은 김치를 다지면 풋내가 난다. 그냥은 신 김치라 해도 꼭 짜서 갖은 양념을 넣으면 특유의 감칠맛이 돋보인다.

먹는 것도 먹도 먹는 거지만, 가끔은 멀어진 고향산천을 되새기며 어릴 적 부모 형제와 이름조차 가뭇해진 동무를 생각한다. 눈감으면 뒷동산 지저귀는 산새들 노래와 어머님의 자장가 소리가 꿈결처럼 떠오르고 문득 아련해지던 느낌이 선하다.

묵은 것은 그렇게 향수적이다. 말은 또 묵었다고 하나 새로운 것들의 근간이고 뿌리다. 우리들 어쩌다 이룬 꿈 역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소망 등이 밑거름으로 된 것일 수 있다. 튼실하게 자라도록 마음 속 깊이 뿌리박아 둔 것인데 우연히 싹이 트면서 꽃이 피고 열매까지 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 소중한 것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 본 민들레와 오랑캐꽃이 예쁘고 화려한 것도 묵혀 둔 밭에서 핀 그 때문이었던 것처럼.

나도 어느 새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나이가 된 거다. 세월과 함께 추억의 연륜도 깊어지면서 40년 50년 묵은 얘기도 숱하다. 추억은 말하자면 삶의 묵정밭에 핀 꽃들이다. 추억이라고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그 또한 거름이 된다. 얼핏 보면 황폐해서 꽃이 필 것 같지 않은 밭인데도 언짢은 기억들이 거름으로 쌓여서 새록새록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을 거다.

묵정밭 풍경이 새삼 떠오른다.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모르나 해묵은 의미를 돌아보게 되었으니 괜찮다. 다시 농사를 짓든 혹은 집터로 바뀔 수도 있지만 민들레와 오랑캐꽃으로 뒤덮여 있던 묵정밭 기억은 남아 있으리. 우리 삶도 갈수록 황폐해진들 그런 속에서도 나름 꿈을 새기고 소망을 새길 수 있으면 좋겠다. 힘들 때는 묵정밭에서 피는 꽃도 예쁘다는 것을 인생 목록에 추가해 본다. 봄물이 차오르는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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