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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봄이 왔다. 남한강만 한 스케치북에 풍경이 담뿍 들었다. 충주시 앙성면에서도 한참 들어간 산골짜기다. 누군지 여울여울 물줄기부터 새기고 조약돌 굴러있는 강변마을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물새의 천국인 비내섬 살짝 띄웠을 테지. 물속에도 구름이 떠가게끔 입체적인 구성과 하늬바람 소리까지 담아내면서.

비 오는 날은 강 건너 비내섬이 촉촉 젖는다, 물안개 자욱하면 띠처럼 어우러졌다. 고즈넉한 분위기 때문에 비내섬인지, 어느 날 까닭 모르게 슬퍼지면 알맞추 비가 내려서 비내섬일까. 송홧가루 날리고 가랑비 흩뿌릴 때는 섬도 비 맞아 울먹인다. 오래 전 섬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슬픔의 강을 떠도는 느낌이었는데.

비내섬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함께 산다. 철철 아름다운 금강산처럼 비내섬도 4계절 풍광이 다르다. 봄을 뜻하는 금강산 자체가 본명이고 봉래산 풍악산 개골산은 예명이듯 비내섬 또한 파릇한 봄 풍경 때문일 거다. 봄에도 예쁘고 늦가을 단풍이 물들 때는 꼭두서닛 빛 노을에 뒤덮인다. 얼마 후 백설의 원시림에 덮이면 태고 적으로 돌아간 듯 낭만적이다.

길모퉁이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얼마나 묵었는지 축축 늘어진 가지에 야들야들 새순이 돋았다. 나무든 섬이든 함께 유구한 세월 굽어보았을 거다. 강원도와 충청도 골짜기 어름에서 시작된 30 리 사연도 남한강 지류 되어 흘러왔을 거라면. 아름드리 고목도 처음에는 작은 씨앗이었고 넓은 강도 한줄기 새암이었던 저마다의 내력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비내섬은 억새를 베어낸다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우거질 때 보면 땔감으로도 썼을 법하지만, 비 내리는 비내섬이 더 고풍스럽다. 가랑비 날리는 그때 나그네 한 사람이 강변을 걷고 있었다. 강변 마을의 습관처럼 정말 갑자기 흩뿌리는데 비 맞으면서 딱 걷기 좋은 정도였겠지.

비가 내릴 때마다 걸음걸음 예쁜 풍경이었을 거다. 우연히 억새를 베어 묶는 사람을 보았을까. 지난해, 땔감을 마련하려고 처음 들어갔을 때도 남한강 억새밭은 고즈넉했다. 뽀얗게 핀 억새꽃이 하도 고와서 낫을 대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 끝내는 겨울을 넘기고 요즈음 같은 봄 뒤늦게 베어내는 걸 보고 그 이름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강변 마을에는 고기 잡는 어부 아니면 농부가 많다. 고단한 직업이었으나 풍경은 아름다웠다. 쟁기질하는 농부든, 그물 치는 어부든 해거름이면 천 년 내리 강물과 땅거미 지는 풍경에 빠져들곤 했겠다.

어둠을 걷어내면서 고기가 든 통발을 지고 혹은 억새를 묶어지고는 나란히 돌아갔겠지. 비가 오면서 꿈속 같은 비내섬이든 억새를 비어내면서 비내섬이든 잿빛도 같고 물빛도 같은 신비가 천 년 내리 정겹다.

눈감으면 계절을 등진 채 멀어지던 늦가을이 보였다. 차마 떠날 수 없는지 군청색 하늘과 비내섬 모퉁이를 돌아나간다. 푸르륵 소리 나면 철새가 까맣게 몰려가더니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을까. 그 다음 서설이 날리면 남한강도 침묵 속에 겨울을 나고 봄을 기다렸던 것처럼.

비단처럼 고운 비내길이 섬을 온통 휘감는다. 어떻게 이름도 예쁜 섬이 태어났는지. 조붓한 길 끝자락은 물결에 휩쓸리고 눈물 강 사연 강처럼 예쁜 남한강이 그리움으로 채색된다.

저만치 물새 한 마리가 흠씬 날개를 접는다. 이름까지 묘한 섬이라서 강변에 날아드는 물새도 예쁘고 바람까지 싱그럽다. 나도 갑자기 날갯죽지 하얀 새 되어 허공을 차오른다. 밤이면 별들도 예쁜 섬 기슭에 내려올 것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헛헛하면 남한강이 보이고 비내섬이 어렸다.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비 맞아 촉촉 젖는 비내섬처럼 우리도 글썽이는 눈물 섬 하나 있었나 보다.

오래전 비내섬 생길 때도 고샅길부터 똬리 틀었다. 낙엽이 쌓이고 물새는 발자국을 새겼다. 물방울 축제에서 보는 안개꽃 환상은 비 내리는 비내섬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풍경 때문에. 그리움에서 발원된 섬 하나 엎드려 있는 풍경 때문에.

어느 날 힘들어지면 내 삶의 여울에도 사연이 둥지를 틀고 감동의 골짜기가 생겨날 거다. 골짜기 시냇물이 모여들 때마다 고을고을 소용돌이치던 물보라. 슬프기는 해도 봄꽃이 피는 내력처럼 시내를 이루고 강으로 마침내 바다로 진입하듯 인생도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비내섬같이 두루두루 굽이쳐야 하리.

가을에는 꽁지 붉은 잠자리도 비내섬 경치 보러 오겠지· 물소리 바람 소리만 들리는 곳에 알음알음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면서 철새도 시끄럽다고 떠나버릴 게 걱정이다. 아무리 먼 길도 이듬해 틀림없이 찾아오는 것은 남한강 중에서도 비내섬의 추억 때문인데 관광지가 되면 풍경도 깨지고 말 거다.

비 오는 날은 지는 꽃 슬프다고 울어주는 빗줄기가 나그네처럼 머무르던 남한강, 강물은 탯줄이다. 비내섬 오솔길도 탯줄이다. 세상 태어났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 흘러 흘러 예까지 왔다. 노을이 지는 날은 산속으로 떨어지던 빛내림이 예쁘고 먼동이 틀 때는 강물을 끓이는 아침 해 빛오름이 예쁘던 그 섬.

자박자박 물줄기 따라 비내섬 전경이 또렷하다. 더불어 살고 있는 갈대와 저녁으로 물안개 풍경도 그림인데 가뭄으로 바닥이 보일 때도 처음 흘러온 발원지 추억을 생각한다. 강물도 외로워지면 한 점 섬으로 머물러 갈 거라던 그 이야기.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눈물강 너울 쓴 채 침묵을 지키는 섬 이야기가 추억의 강으로 굽이쳐 흐른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경과 강물소리를 두고 어찌 떠나야 할지 걱정이지만 꿈결이면 가르마처럼 섬 고샅고샅 오솔길 돌아가던 풍경이 점점 떠오를 것 같다. 냇물에서 강으로 흘러갈 동안 꽃 여울과 푸르게 녹음 파일 저장하면서 비내섬 비단길에 슬픈 곡절 풀어놓았던 것을 보면.

가끔은 세월 강 모퉁이에 떨어진 시간을 되감으며 추억 돌아보리라. 그래서일까. 딱히 가진 건 없어도 남한강 비내섬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은· 하늘에는 구름이 예쁘고 기슭에는 물새가 둥지 트는 거기야말로 꿈속의 고향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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