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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터널이다. 일렬로 늘어선 은행나무가 가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노랗게 물든 이파리가 햇살에 반짝인다. 산은 또 언제부터 그 많은 색소를 준비했는지 비껴가는 그림자도 물든다.

 빛깔도 빛깔이지만 산자락 골골마다 어떻게 스케치가 가능했을까.

 땅으로 스며든 빗물이 초록 들판 만들고 꽃을 피우듯 곳곳에 터널을 만들었다. 골짜기에는 굴참나무 잎이 현란하고 길섶에는 잡초들까지 빨갛게 울먹인다. 참 예쁜 풍경인데도 방하착 방하착. 금방 초겨울이다. 잎을 달고 있어도 추울 텐데 무조건 내려놓으란다.

 시월도 그믐께, 단풍산맥에서 듣는 초록강물 소리가 짠하다. 시간을 거슬러가 면 언 땅을 뚫고 나오던 새싹이 보였다. 드문드문 꽃샘에 잎샘에 시달리더니 어느 날 산벚꽃 아치가 생겼다. 여름내 초록에 녹음으로 벌창하고는 바람 끝이 차가워지면서 단풍터널로 바뀌었다.

 녹음이 빠져나간 산자락이 아슴아슴 가깝다. 단풍강 발원지에서 하류에 이를 동안 사연이 한때 푸르렀던 나무 가득 물든다. 여름내 가으내 꿈을 새기고 비바람과 천둥번개의 곡절을 땀땀 새겨 넣는다. 내려놓을수록 찬란한 단풍골 내력이다.

 초록에 겨운 단풍이 붉은 강으로 흐른다. 특별히 계곡 쪽으로 향한 가지는 붉은 색소를 들이부었다. 어둡고 응달이라서 좀 더 일찍 물들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제법 울긋불긋한데 양달에는 아직 푸르스름한 잎도 많다. 햇볕 드는 위치와 풍경에 따라 다양한 빛깔이다. 물드는 것도 순서가 있고 차례차례 기다릴 동안 형성되는 가을단풍 일대기였다.

 하지만 어찌 터널이었을까. 지금 보는 은행나무는 가로수라서 애당초 그리 심었다지만 절로 자란 인근의 단풍나무도 그렇게 마주보았다. 꼿꼿이 서 있으려도 바람 때문에 어깨를 겯고 막아주면서 경건한 나무로 자랐다. 늦가을이면 단풍으로 물을 내리고 그마저도 떨어뜨린 채 동안거에 들어간다. 그 다음 잿빛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터널이 그려지곤 했었다.

 단풍이라고 모두 곱지는 않은 듯 끝이 하얗게 바랜 것도 있다. 구멍이 뚫려 있고 어떤 것은 벌레까지 먹었다. 저만치 문득 연기가 피어오른다. 단풍이 좀 더 고와지면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단풍골 안개로 번져나갈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잎마저 완전히 떨어뜨리면서 겨울을 준비하겠지. 배경을 돌아본다. 해동이 되고 이른 봄에는 많이 길어 올릴수록 좋았다. 그 때 길어 올린 만치 나무도 초록 잎 달고 푸르러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잎이 떨어질 즈음에는 아낌없이 내려놓아야 될 거라는 단풍나무 한 살이.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아낌없이 놓아버려라 그래야 살 거라는, 이름 그대로 방하착나무다.

 우리도 이른 봄 물 긷는 나무들처럼 한때는 왕성한 의욕을 갖고 살았다. 목표를 달성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 열정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가을의 단풍나무처럼 똑같은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가끔은 물을 길어 올리는 것보다 내릴 때가 더 힘들 수도 있는 것처럼 문제는 바로 그 시기였다. 잎 하나 없이 떨고 있을 때는 앙상해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물기 때문에 죽어버린다. 찬란한 빛깔 이전에 겨울을 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물 내려 단풍잎을 새기고 생존의 방편으로 삼는 나무가 이 가을 참 아름답다. 더 많이 포기할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처방은 간단한데, 초록과 물기를 빼고 나니 천하의 가을처럼 되는 게 쉽지는 않다.

 그나마도 참 고운 빛깔이 선하다. 끝내는 노화현상인데 단풍이 고운 게 비결이 있다면 답은 나왔다. 더 많이 갖고 싶어서 아등바등 살다가는 떨어지면서 아름다운 단풍의 묘수를 배우지 못한다. 방하착, 방하착. 붙잡고 있은들 뾰족한 수도 없다. 괜한 집착으로 골치가 아프고 건강을 잃는다. 무조건 내려놓으라는 처방이 나왔는데도 노심초사하는 내가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 앞에서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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