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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3.05 15:59:52
  • 최종수정2023.03.05 15:59:52

이정희

수필가

구름이 몰려든다. 도서관 뜰의 나무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어느 새 3월, 봄 초입인데도 빈 가지에서 휘파람 같은 소리가 울린다. 바람이 불면 나무는 악기가 되곤 했었지. 바이올린의 몸체가 북쪽에서도 더 외진 방향의 가지로 만들어지는 얘기를 생각했다. 한 나무에서 뻗은 가지였건만 생각하니 바람을 안아 올린 방향 문제다.

일반적인 재목들의 튼튼하고 견고한 재질은 알맞은 수분과 토양으로 결정되지만, 바이올린의 섬세한 소리는 외부적 조건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어떤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의지와 내면의 세계에서 형성되는 정신적 지주라야 했고, 1차적인 조건이 북쪽의 차가운 바람을 맞는 거였다.

언젠가 동백나무를 키울 때의 일이다. 십 년쯤 지나자 간수하기가 힘들어서 동생에게 주었는데 한 번은 보니 뒤뜰에 심어놓았다. 겨울이면 들여놓던 나로서는 뜻밖이었으나 북쪽으로 막혀 있어서 괜찮다고 했다. 바람에 크는 나무였는지 장독대 아래 한껏 푸르다. 겨우내 땅속에서 핏물을 져 내렸겠지. 봄이면 그래서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걸까. 여름에도 서늘했으니 겨울에는 그야말로 쇠 응달인데 멀쩡하다.

도서관 뜰의 나무도 기왕이면 북쪽에 머리를 두고 싶어 했을 것이다. 겨울바람이야말로 자신의 음률이고 노래였다는 각오로 가지를 든다. 그렇게 시달린 탓으로 태풍과 비바람을 견딜 수 있었다. 혹독하게 치른 역경은 순조로운 삶의 모태가 된다. 바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겨울나무처럼.

나도 북쪽으로 머리를 들고 있는 한 그루 나무였을까. 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 헐벗은 채 지내던 그때, 몸은 고사하고 마음까지 얼어붙는 날들에도 북쪽의 나무처럼 삶의 찬가를 연주할 수 있기를 구도했다. 요즈음 나의 삶이 그나마 윤택하다면 북쪽에서 그것도 바람모지에서 보냈기 때문이지 싶다. 춥고 어두운 곳이었지만 그만치 따사롭고 아늑한 이미지였다.

북쪽은 환상과 꿈의 방향이다. 눈 덮인 골짜기에서 순록이 썰매를 끄는가 하면 자작나무 숲 언저리마다 별들이 둥지를 튼다. 밤이면 통나무집 등불이 꿈속처럼 잦아들기도 한다. 북극의 상징인 오로라도 북쪽의 신비를 드러낸다. 녹색 불길의 분수가 지평선에서 까만 빌로오드 하늘 끝까지 번진다. 빨갛고 흰빛이 녹색 주위에 안개처럼 끼어 있는 것도 북쪽의 냉기가 연출하는 동화적 비경이다. 춥고 어두워도 참아 견딜 생각이 드는 것처럼.

울타리에 청둥오리가 날아든다. 자갈색 몸의 푸른 반점을 보니 그들의 생활 반경도 북쪽이었다. 언제나 아련한 느낌이었지. 까마득한 여고 시절 그때도 늦가을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뒤뜰에서 오동잎 지는 소리와 함께 떠나는 가을의 기척이 들렸다. 불현듯 책을 덮고는 밖으로 나왔다. 쏟아지는 달빛이 한껏 부신데, 명주실처럼 얽혀 있는 것을 치우면 예외 없이 지나가던 철새들 무리.

지금도 겨울 철새를 보면 마음이 쓸쓸해 온다. 그런 중에도 힘찬 날갯짓이 느껴진다. 춥다거나 바람이 센 것과는 다른 안전지대 같은 푸근함이다. 나침반의 바늘도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름다운 선율일수록 북쪽에서 자란 나무의 어둡고 차디찬 손길로 조율이 되듯 나도 그렇게 삶의 찬가를 연주하고 싶었던 걸까. 초록이 지워진 한겨울, 거미줄 치는 바람 때문에 한껏 낭만적이던 겨울나무를 보면 힘겨운 삶 역시 축복이다.

찬바람을 뚫고 자란 나무가 맑은 소리를 내듯 겨울을 이겨낸 봄도 앞으로는 한껏 푸르러지겠지. 얼어붙은 땅속에서도 씨앗은 초록을 틔우듯 겨울은 봄의 모태로 남는다. 바이올린의 섬세한 리듬이 북쪽에서 자란 가지의 아픔을 노래한 것처럼, 사는 것은 힘들어도 원숙한 날들의 모태가 된다. 한 그루 나무조차도 바람을 감수하며 살았다. 춥지 않고는 겨울일 수 없는 것처럼 힘들지 않고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의지도 굳혀 본다. 봄으로 가는 간이역에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겨울나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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