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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봄빛이 완연하다. 거실을 정리하면서 석류나무를 내놓았다. 까칠한 줄기가 겨드랑이며 얼굴을 사정없이 할퀸다. 다 좋은데 가시가 말썽이라며 지하실 계단을 오르내린다.

뻐꾸기 소리가 뜸해지면 봄도 얼추 끝난다. 오줌 갈기를 내쏘듯 하는 서슬에 거미줄은 성글어지고 얼마 후 석류꽃이 벙근다. 먹구름이 잔뜩 끼는 장마철, 마당에 나와 보면 석류꽃만 환하다. 나는 또 지체 없이 석류꽃 잎을 모으기 시작한다. 자칫하면 눅눅해지기 때문에 한 장 한 장 펴서 말렸다. 나무말미도 없이 장마철이지만 거풍을 시키면 붉은 노을 빛깔이 여름내 곱다.

선홍색 꽃잎이 엷어질 때는 장마도 끝나고 그때부터 익는다. 어느 날 된 볕을 받아 짝 갈라진 열매에서 그냥은 터질 수 없다는 몸부림을 본다. 터뜨리지 못한 속내라면 꺼멓게 삭았을 텐데 무르익은 속은 눈부시기까지 하다. 가시 때문에 핏물 고운 꽃으로 피고 열매도 탱글탱글해졌다. 뻐꾸기 소리 듣고 핀 꽃이 갈 볕에 지면서 연거푸 물이 든다.

명자나무 가지에 바람이 지나간다. 이따금 꽃샘이 기승을 뿌릴 때는 다보록한 망울이 다 떨어진다. 필 때도 고르지 못한 날씨가 질 때까지 바람이다. 꽃이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오늘 아침 봉오리 진 것은 하루도 못 가서 져 버릴 테니 걱정스럽다. 마루 끝에 있으면 번지는 꽃망울이 보였다. 해거름에는 꽃보다 진한 그리움이 번졌다. 유달리 바람을 타는 명자나무가 낙화도 전에 풍장이 된다.

추워 떠는 기색을 보면 나까지 속상했다. 꽃송이마다 파고든 가시를 보면 안타까웠다. 꽃잎이 망가질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가시를 치워 준다고 가위질을 하다가 번번이 긁혔다. 팔뚝에도 두드러기가 퍼진다.

가려워서 긁으면 핏자국이 나 있고 며칠 후에는 봄비가 쏟아졌다. 꽃잎이 쓸려 가면 알싸한 봄기운도 가라앉는다. 봄도 홍역을 치르는 중이었다. 가시로도 잡지 못한 열꽃이 제풀에 스러졌다. 봄과 나는 똑같은 알레르기성 체질이었던 걸까.

무너진 돌담을 장미 한 그루가 휘감는다. 제멋대로 얽힌 덩굴에서 가시보다는 찌르는 게 더 힘든 아픔을 본다. 아름다움이 고통이라면 가시야말로 참을 만한 여지가 있다. 그 때문에 찔리면서 피는 것 같다. 오래전에 상처 난 붉은 가슴 빛깔도 그 무렵이면 선명해졌다. 하늘은 그림처럼 떠올라 있고 신록도 눈에 띄게 푸르러진다.

하필이면 그런 날 숨바꼭질을 했다. 술래에게 쫓겨 다니면서 급할 때는 탱자나무 울타리에 숨었다. 술래를 피해 들어간 꽃그늘에서 나처럼 숨어 있을 가시를 생각했다. 바람에 진해지는 향기가 눈앞을 맴돌았다. 똑같은 빛깔이고 모양새인데 가시에 뒤덮여서 곱게 보이는 줄 알았다. 사실이었지만, 가시에 찢기면서 몸부림쳤을 꽃술의 향기는 그윽하기만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제가 저를 찔러대면서 핏물을 져 올린다. 그렇게 해야 아픔을 삭일 수 있다니 가시가 아니면 더는 장미일 수가 없는 것일까. 가시 때문에 고운 장미가 바람에 또 한 번 향기를 뿜는다. 가시가 있어야 장미라고 하듯 그리움으로 채색되는 눈물범벅이라 그렇게 고왔다.

선인장은 사막의 꽃이다. 풀 한 포기 없는 모래밭에 밤낮 서 있었다. 갈증으로 딱딱해진 가시는 오랜 날 흘리지 못한 눈물의 결정이다. 뿌리 대신 돋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없이 타들어 간 걸 보고는 마음의 생채기를 생각했다. 그럴 경우 뿌리로 물을 머금을 텐데 선인장은 가시로 수분의 증발을 막는다. 가도 가도 물 한 모금 볼 수 없는 사막에서 가시를 내밀어야 했다. 가시가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일대기였다.

어릴 때부터 뾰루지가 자주 났었다. 욱신거릴 때는 참을 만했는데 나중에는 들여다보는 게 더 고역이었다. 견디다 못해 바늘로 고름을 빼는데 바늘 독 때문인지 퉁퉁 부어올랐다. 독이 없고 뾰족한 것을 생각하던 중 선인장 가시를 찾아냈다. 굵은 것을 뽑아서 째니 피고름이 터져 나온다. 더는 따가울 수 없는 가시가 고름뿌리를 가라앉혔다. 가시로 부풀려지는 꽃처럼 부스럼도 생짜로 뭉쳐 있었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다스려 온 치료법이다. 따가워도 좋을 수밖에 없는 배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보랏빛 꽃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아픈 건 아니야. 가시를 잡아 주지 않아서 외로운 거지." 하지만 그에 맞춰서 따지듯 반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시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데 뭐라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러나 곧 타박이나 주듯 "그 속에서 피는 나도 있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구."라는 담담한 목소리. 가시는 갈증으로 굳어버린 눈물샘이었던가. 그와 함께 "치우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들어가란 말이야?"라는 지청구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어 "가시가 없으면 꽃을 피우지 못해."라는 탄식이 들렸다. 뿌리가 약했었다고. 그래서 가시성을 쌓은 건데 왜 거부하는지 모르겠다나? 뒤미처 "꽉 잡으면 돼. 그러면 절대 아프지 않아." 라는 혼잣말이 짠하다. 그러자 "닿기만 해도 아플 텐데 꽉 잡으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담."라고 내뱉듯이 단호했던 그 목소리.

유감이지만 진심이었을 거다. 이해를 하려고 해도 친근해질 수 없는 가시의 속내가 그려진다. 볕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여름 저를 찌르다가 터진 비명이다. 엉겅퀴는 좋아도 가시는 부담스럽다. 공교롭게도 그마저 푸념 같은 소리에 묻혀 버렸다. "가시 때문에 멀리하면 나는 혼자 필 수밖에 없어."라고 하는 원망의 탄식.

아무리 그래도 잡아 주지 않는 손길 때문에 엉겅퀴는 혼자서 핀다. 느닷없이 꽉 잡아야 하는데 겁부터 집어먹는다. 따갑기는 해도 견딜만하다. 가시를 외면하듯 저마다의 삶도 등한시한다. 무조건 껴안으면 가시도 악착스럽게 굴지 않는다. 그런데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상처를 준다. 삭일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삶은 어쩔 것인가. 가시의 공통분모는 아픔이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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