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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마을 초입에 연못이 하나 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각종 장비를 설치한 뒤 밑밥을 뿌린다. 물고기가 모여들도록 하고는 미끼를 꿰어 잡는 것이다. 밑밥만 먹고 달아나는 녀석이 있고 욕심으로 미끼를 무는 녀석들이 변을 당한다.

밑밥에서 만족하면 되련만 미끼에 혹하다가 사달이 난다. 낚시꾼으로서는 밑밥만 먹고 도망치는 게 얄미울 테지만 고기는 미끼에 걸리고 사람은 잇속에 망한다. 밑밥이 어딘가 있을 미끼를 암시하고 덫을 동반한다면 인생의 낚시꾼도 우리를 떠 볼 것이다. 낚시꾼과는 달리 미끼를 외면하고 승리하기를 바랄 테니까.

미끼는 위험해도 밑밥은 안전하다. '밑을 닦다, 밑이 구리다'라면 하찮게 들릴지 모르나 밑에서 올라가는 것보다 창조적인 건 없다. 아침에는 또 낡은 책에 그어진 밑줄을 보았지 않은가. 구절구절 표시된 것을 보니 밑줄을 강조하시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밑줄을 치라고 하면 대부분 시험문제에 나왔었다. 직접 일러주는 대신 귀띔을 해 주셨던 거다. 내 인생도 밑줄을 칠 때가 되었나 보다. 밑으로 시작되는 낱말의 뜻을 헤아려 본다.

암탉이 알을 낳을 때는 꼬꼬댁 소리가 집안을 뒤흔들었다. 어릴 적, 홰치는 서슬에 놀라 뒤꼍으로 가면 암탉은 그 새 보이지 않았다. 달걀은 언제나 두 개였고 그 중 갓 낳은 걸 꺼내는데 남겨 둔 하나가 밑 알이다.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넣어두는 것을 모르고 몇 번 꺼내먹다가 꾸중을 들었다.

내 집에서, 그것도 한자리에 낳게끔 붙박이로 넣어둔 거라니 어찌 뜻하였으랴. 바쁘신 어머니가 미처 꺼내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계속 이웃집에 가서 낳는 바람에 들통이 나 버렸다. 달걀보다는 처음 낳는 닭이 얼떨결에 남의 집으로 가는 혼란 때문에 어머니는 더 신경을 곤두세웠던 거다.

밑돈이나 밑천도 그런 돈이었을까. 수입이 적어도 밑돈이 있을 때는 회생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남겨둘 것은 있다. 학창 시절,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철부지가 뭘 알까마는 '폐허 속의 꽃처럼"으로 가치관을 정했다. 소신만 뚜렷하면 어떤 경우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으로 보았다. 사막에도 별은 뜨고 돌밭에서도 꽃은 필 테니까.

그 다음은 밑거름이었다. 오래 전 닭장 옆에 있었던 두엄자리가 생각난다. 여름이면 우리 집 머슴은 풀을 잔뜩 베어왔다. 이어서 다발로 묶은 후 바지게로 오줌을 퍼서 풀 더미에 붓고는 밑거름으로 썼다. 거름 때문일까, 아욱과 참비름도 야들야들하게 올라왔다. 어찌나 탐스러운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먼저 살던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이사 올 때 보니 두엄자리가 있고 어찌나 묵었는지 냄새가 풀풀 났다. 짐 정리가 끝난 후 화분마다 잘 썩은 거름흙을 채웠다. 화초는 눈에 띄게 잘 자랐다. 이웃 사람들도 우정 와서는 화초를 잘 가꾼다고 했다.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거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게 동이 날 때도 밑줄을 치면 희망이 보인다. 뭔가 풀리지 않을 때도 거름이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어야 하리. 꿈도 추락하고 포기했던 만치 이루어졌다. 밑줄로 보는 세상은 정직하다. 밑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다. 올곧은 삶을 지향할 뿐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다. 힘들 때도 꿈은 잃지 말아야 하리. 감자니 무도 밑이 들면서 굵어진다. 내 인생의 밑도 그렇게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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