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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씀바귀를 무쳤다. 민들레는 양념장에 재우고 쑥은 들기름에 일구었다. 맛나다. 독특한 향이 입맛을 자극한다. 가을이 뽀얗게 피는 식탁에서 동무들과 보낸 시간이 모처럼 쏠쏠하다. 이듬나라에서 꺼낸 추억 때문일까.

늦가을에 웬 씀바귀나물이냐고 질문이 쏟아졌다. 냉이도 봄나물인줄만 알았더니 민들레와 쑥은 또 어디서 캐 왔느냐는 의혹도 빗발친다. 구태여 설명보다는 웃음으로 넘겼다. 가을에도 봄나물은 있지만 이듬나라 전설까지는 몰랐을 거다. 초벌요기가 끝난 뒤 내력을 일장 설파했던 것.

지구상의 수많은 나라들처럼 별도로 독립국은 아니다. 서리거둠 반도에 생겼다가 나그네새처럼 사라지는 특별한 나라. 된내기에 서리 까마귀 울 때는 비상시국인데 살짝 살짝 볕들면서 앙증맞은 나물이 돋는다. 하늘이 말개질 때는 서리가 내린다면서 머릿수건 동이신 채 재우쳐 가던 어머님 나라. 박꽃이 뽀얗게 필 즈음이면 텃밭으로 봉긋하게 자라던 나라.

다 저녁 때 와서는 툇마루에 와르르 쏟으셨다. 소쿠리를 쳐들면 동부 꼬투리와 호박잎이 가득했다. 여물지 않은 동부로는 동부개떡을 찐다. 얼기설기 호박잎은 콩가루 묻혀 된장국을 끓이고 상추와 쑥갓은 겉절이를 무치셨다. 알뜰히 가을걷이에 푸성귀라곤 귀할 때다. 맛이 각별할 수밖에 없고 거취가 궁금하다.

내 좋아하는 동화 속 어린왕자는 저 혼자 묵는 별 있다더니 늦가을이면 어머니도 이듬나라에 기거하셨다. 왕자가 별을 떠나 사막에 와서도 두고 온 장미를 걱정하듯 어쩌다 생각나기는 해도 희망의 아지트다. 내처 사는 곳도 아니었으나 찬바람 가랑비에도 짬짬 푸성귀가 푸짐하게 자라듯 어머니의 제 2공간도 그렇게 뿌리박았다.

된내기가 뿌리고 나면 허옇게 뜨지만 금방 또 파릇해진다. 두 번 세 번 이듬으로 나온 것 위에 또 후렴이다. 보름 뒤에는 사라져도 반복되는 서리거둠 풍경은 흐벅지다. 어머니도 한두 번 아닌 수차례 서리거둠을 해 왔다. 그냥 두면 얼기 직전인 늦가을 조금씩 아껴먹는 운치를 배운다. 이듬나라 건국이념도 된내기 초록이었으므로.

어머님의 이듬나라를 거슬러 가면 초가을 아래뜸이다. 뜰에는 멍석이 펼쳐지고 콩 단 들깻단을 널었다. 방에서 들으면 알갱이가 멋대로 달아난다. 마루 밑에 떨어지고 샘가에도 흩어졌다. 한 두 개라면 들키지 않는데 서너 개씩 터질 때는 방안에까지 야단스럽다. 서슬에 놀라서 나오면 신발 속에까지 들었다. 콩을 밟으면서 쭐쩍 미끄러졌다. 어머님 손에 초벌 빠진 꼬투리는 연신 틀어지고 쨍쨍한 볕에 터지면서 사달이 났다.

휑뎅그렁한 텃밭에도 이듬 자랄 뭔가는 있다. 보통 땅덩어리처럼 발을 붙이고 사는 곳은 아니지만 밤에는 별이 뜨고 달빛도 고왔다. 서리와 된내기로 며칠 안 되는 날이 귀하게 느껴지듯 허구한 날 불행이라 알차다. 한때는 철새처럼 집시처럼 생각했지만 시월 말에 한번 뜨는 보름 안팎 땅은 배부른 풍경이다. 기러기도 하늘이 까맣게 날아가더니 엊그제는 마지막 행렬인 듯 예닐곱 마리 뿐이다. 모두들 떠난 후였지만 잠깐 이듬나라에서 쉴 것 같은 상상도 늦가을 다 저녁때 해거름이다.

심란할 때는 잠깐 망명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찾는 사람도 없고 외로울 것 같지만 욕심을 접고 숙이면 예쁘게 살 수 있는 나라다. 가난해도 비단가난으로 여길 수 있고 그럴수록 기와집 짓는 품성이면 더더욱 빛나는 나라. 혼자 머물러 있으니 누구에게 뽐을 내거나 주눅들 것도 없고 분수에 맞춰 살기에는 최고 적정하다.

내 명의로 된 지상 최대의 낙원은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애써 지킬 것도 아니고 욕심 많은 사람 눈에는 띄지도 않는다. 휴가철 다녀오는 별장도 굉장한데 한 나라를 독차지했다. 희귀한 나라다. 바다 가운데 섬도 전세 내기는 복잡할 텐데 금은보화로도 살 수 없는 재산 목록 1호에, 하늘도 아닌 데서 보는 인생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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