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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냉이를 다듬다 보니 시든 게 꽤 많다. 얼었다가 녹았는지 허옇게 떡잎이 지고 보랏빛으로 칙칙해진 것도 있다. 겨우내 떨다가 질린 거라고 했으나 끓는 물에 데치면 거짓말처럼 파랗게 살아났다. 겨울을 비집고 나온 뿌리심이다.

냉이를 캐던 날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한 뿌리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춥고 힘든 체 엄살을 떨라니까. 그래야 꽃샘바람의 직성이 풀릴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면 더 심술을 부리지 않겠어?" 하지만 이어서 "그래 가지고는 봄을 만들 수 없어. 무모하기는 해도 달걀로 바위 치는 배짱이 아니면 겨울을 깨부수지 못해"라고 하는 다부진 소리.

꽃샘바람도 그 말을 들었다면 맥이 풀리지 않았을까. 바람 끝이 매서운 초봄, 꽃이 피고 잎 트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갖은 폭설을 퍼붓곤 했다. 그럴 때마다 봄이 올까 싶었지만 냉이를 보고는 안심을 했었다. 장정 열이서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하듯 꽃샘바람 군단이 봄을 이긴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운명도 결사적일 때라야 물리칠 수 있다. 독을 이기는 것은 독 외에 없듯이 지독한 운명에 맞서는 건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할 꿋꿋한 자세다. 한갓 봄나물조차도 모질게 사는데 어찌 투정을 부리겠는가. 인생은 엄살이나 부리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

냉이를 캘 때 크다 싶으면 돌밭이나 딱딱한 자리에 뿌리박았다. 해동이 될 즈음에는 봄비가 자주 내렸고 한 보름 간 축축해져도 여간해서 딸려 오지 않는 걸 보면 대단한 뿌리심이다. 양지쪽 비옥한 데서 다박다박 얽혀 자란 냉이는 잎사귀 치레다.

응달에서 자란 것도 마찬가지다. 봄인데도 잔설이 희끗희끗한 곳에서 기를 쓰고 올라왔었지. 얼어빠진 잎은 시들어서 볼품없건만 당겨도 잘 뽑히지 않으니 얼음이 녹지 않는 응달에서 뿌리심만 키웠다. 냉이 말고도 봄나물은 많으나 일찍 나오기 때문에 특별순위에 놓고 그리 예찬하는 건 아닌지.

다음으로 튼튼한 냉이는 동무도 없이 홀로 자랐다. 얼마나 밟혔는지 잔뿌리도 없이 뻗어나간 게 여타 나물보다 곱절은 크다. 돌밭인데도 바짝 파고들어 늘씬하니 곧은 뿌리가 되면서 또 다른 영역을 구축했다. 거름이 좋다고 잘 크는 게 아니듯 거칠고 외진 땅 바람모지에서 혼자 그렇게 강해졌나 보다.

겨울의 빗장을 뽑을 수 있는 것은 독종이라고 할 봄의 뿌리고 그래서 매장된 초록이 살아났다. 겨울을 나지 않았더라면 냉이는 그렇게 맛을 낼 수가 없고 그래서 이른 봄의 나물이 보약만치나 좋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그 무엇도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는 봄나물 뿌리심은 당할 수 없고 그게 1년의 초록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다.

나도 그렇게 자라리라고 생각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건 양념과 고명으로만 여길 뿐 삶의 목록에는 끼워 넣고 싶지 않다. 겨울을 나야 봄이 된다. 늦추위도 아랑곳없이 싹을 틔우는 데서 힘들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는 삶의 묘리를 본다. 추워도 잘 넘기고 견딜 때 특별한 냉이로 자라듯 어려움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다.

이제 콩가루에 묻혀 끓여내면 집안에 봄이 가득찰 것이다. 삶아서 무쳐도 탑탑한 맛이 난다. 어떻게 요리하든 특유의 내음이 돋보이는 것 또한, 응달인데다가 채 녹지 않은 땅에서 캔 의지가 가미된 까닭이리라. 따스해지면 잎도 푸르러져 다듬을 것도 없겠지만 추울 때 캐는 냉이야말로 오리지널에 진짜배기다.

겨울의 혹한도 모자라 꽃샘바람에 시달리는 것은 설상가상이 아닌 금상첨화로 더 좋게 될 증좌다. 돌밭이고 응달이라 더욱 힘들었을 그들 냉이야말로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주자가 아닐지. 봄은 누가 뭐래도 겨울을 견딘 자의 몫이며 그 꽃눈을 싸안는 것은 겨울이라는 걸 냉이를 캘 때마다 교훈처럼 새겨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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