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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1.07 17:42:00
  • 최종수정2019.01.07 17:42:00

자영스님

자연음식요리가, 화림전통음식연구원장

예로부터 새해가 되면 첫인사와 선물을 주고받는다. 요즘같이 물목이 다양하지 않던 때에 미나리는 대용품이었다. 미나리는 바치는 것[獻芹], 근훤(芹暄), 근폭(芹曝)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해마다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품으로, 임금이 직접 참가하는 나라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 중의 하나였다.

미나리는 변변치 못한 선물로 널리 쓰였다. 3세기경 중국 위진시대의 혜강은《혜중산집》에서 기원전의 열자가 말했던 미나리 고사를 인용해 보잘것없는 성의로 미나리를 선물했다고 한다.

미나리는 근(芹)이라 처음 기록됐다. 기원전 479년에 편찬된《시경》의 "즐거워라. 반궁의 물가에서 그 미나리를 사뿐히 캐노라." 또 "펑펑 솟아나는 샘물가에서 미나리 캐며 흥얼거리노라."고 했다. 중국 서한시대의 유희는《이아》에서 미나리를 초규(楚葵)라 했다. 동진의 곽박은《장서》에서 물속에 자라는 근채(芹菜)라 적었다.

3세기경 중국 서진 때의《신농본초경》에는 미나리의 이름이 수근(水斳)이고, 또 다른 이름은 수영(水英)이며 못에서 난다고 기록했다. 이로부터 대부분의 본초학에 미나리 이름을 수근(水斳)이라 적게 됐다. 5세기 말엽 도홍경의《본초경집주》에는 강에 있는 미나리를 사근(渣芹)으로 적었다. 소경 등이 659년에 지은《신수본초》에서는 "날로 무친 나물이나 또는 날로 먹을 수 있다. 세간에는 흔히 근(芹)자를 쓴다."고 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손사막이 682년에 펴낸《천금익방》에서 미나리를 수근(水芹)이라 적으면서 중국에서 쓰는 표준명이 됐다. 명나라의 주체가 1406년에 펴낸《구황본초》에는 미나리의 생생한 그림까지 볼 수 있다. 명나라 때 이시진의《본초강목》에는 "옛날 미나리 맛이 좋다고 하여 윗사람에게 바쳤다가 조소를 당한 헌근(獻芹)의 고사가 있다"고 소개했다.

신라의 최치원이 미나리를 처음 기록했다. 당나라의 회남에 있으면서 886년에 지은 "시골 노인이 드리는 미나리처럼 여겨 주셨으면 한다."며 변변치 못한 선물이지만 그 성의로 받기를 청하는 글이 그의《계원필경》<물장>편에 전한다.

고려 후기의 이인로는《파한집》에서 원황제에게 바치는 토산물로 미나리를 보냈다. 이규보는《동국이상국집》에서 "보잘것없는 미나리를 보낸다"는 것과 약소한 예절을 차린다고 근훤(芹暄)의 성의를 미나리에 담았다고 했다.《고려사》<예1>의 길례대사에는 "임금이 직접 참가하는 나라의 제사에 근저(芹菹)를 올린다." 또 <열전>에서는 미나리밭(芹田)을 기록하는 등 고려 이전부터 미나리를 먹어왔다.

고려 고종 때의《향약구급방》에는 미나리의 별칭으로 '묏미나리 뿌리(山叱水乃立)'라고 한자의 음과 새김으로 풀이름을 시호(柴胡)라 적었다. 김안국 등이 1542년에 편찬한《분문온역이해방》에는 시호라는 한자 풀이름을 한글로 '뫼ㅅ믈나리'라 옮겨 실었다. 묏미나리로 추정할 수 있는 어원은 믈나리>므나리>미나리 순으로 소리가 바뀐 것이다.

1481년에 간행된《분류두공부시언해》에는 근(芹)의 새김을 한글로 '미나리'라 처음 풀었다. 1527년 최세진은《훈몽자회》에서 근(芹)을 '미나리'로 적으면서부터 미나리 표기는 줄곧 이어졌다.

《세종실록》에는 왕릉의 제사상에 미나리김치[芹菹]를 올린다고 했다.《세조실록》에는 헌근(獻芹),《중종실록》등에는 근조(芹藻) 등으로 적었다.《일성록》에는 과거시험의 제목으로 미나리를 사용했다. 채식을 좋아한 서거정은 "미나리는 예로부터 좋은 나물이라 아침 밥상에 국거리도 좋다." 매월당 김시습은《삶은 미나리》에서 "잘 차린 음식의 향보다 더 짙다"고 했다. 명나라 사신 동월은《조선부》시에서 "조선인은 왕도와 개성 민가에 있는 작은 연못에 미나리를 심었다."고 했다.

1692년 인현왕후의 복위운동 때에 한양의 아이들이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라 부르던 가요가 유행했다. 연암 박지원은《예덕선생전》에서 도성의 왕십리와 석교, 청파의 물미나리 등을 소개했다.《홍재전서》에는 제사에 쓰이는 시물로 '물풀의 김치[水草之菹]'로 미나리 김치를 제물로 적었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한 미나리는 어류를 먹고 탈이 나거나 '더위 먹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이다. 거머리가 붙은 논미나리(미나리꽝)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다음, 한재미나리처럼 밭미나리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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