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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8월 내내 비가 내린다. 감람색 구름이 남서쪽에서 몰려와 하늘에 커튼을 치고, 이윽고 무거워진 물방울이 바람과 중력을 타고 대지를 적신다. 베트남의 열대성 사바나 비는 급작스레 찾아온 손님처럼 왔다가 볼일이 있다는 듯이 곧바로 떠나버린다. 구름이 천지에 물을 뿌리는 동안 숨어있던 자연은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

우기에는 많은 동식물이 새로운 활동을 시작한다. 씨앗은 싹을 피우고, 식물들은 물과 영양을 빨아들여 수맥과 가지를 활짝 연다. 땅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곤충의 알도 비가 오면 깨어난다. 비 갠 들녘에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는 새집을 찾는 신랑 각시처럼 곱다. 며칠 전, 사무실 뒤편의 웅덩이에서 피라미 떼가 뛰노는 모습을 보았다. 메말랐던 땅에 어떻게 물고기가 들어 왔는지 신기했다. 땅속에 숨어있다가 나타났을까, 아니면 바다까지 이어졌던 비의 물길을 따라 흘러들어왔을까. 짧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오묘한 자연의 원리이다. 이렇게 천둥과 번개를 거느린 구름 비가 지나간 뒤, 온 만물은 새롭게 소생한다.

초목의 빛깔을 바꾸는 것처럼, 빗물은 사람의 심상도 바꾼다. 물의 세계는 침잠과 성숙의 세계이며 원초적인 것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깊은 사유의 세계이기도 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거리에서 비를 만났다. 빗물은 어린애처럼 달려와서 몸에 안기고 이내 피부를 타고 흘렀다. 물방울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내 마음도 움직였다. 옆집 주차장이 양철북처럼 현란하게 울렸다. 바짓가랑이에 차가움을 느끼다 불현듯, 천상병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고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다오.

─ 장마, 천상병

저녁 무렵 시인은 골목길을 걸어간다. 머리칼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은 온몸을 적신다.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을 보며 시인은 사랑을 갈구한다. 비처럼 자신의 온몸을 흠뻑 적시는 사랑을 열망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억수>와도 같이 세상을 적시는 사랑일 것이다. 비가 시인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내리고, 우리 모두 젖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는 내리면서 주변의 빛과 함께 섞인다. <저녁도> 아닌 <심야도> 아닌 어느 어두운 <한밤>의 <골목어귀>는 시인이 처한 어떤 현실이리라. 시인은 비에게 <용서>를 구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온몸에 비를 맞으며> 가는 것은 자신의 어떤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보인다. 시인에게 내리는 비는 사랑으로 적시는 비인 동시에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벌을 가하는 비인 것이다. 비를 맞으며 사랑과 용서를 함께 구하는 시인의 마음은 아마 하늘에 닿아있는 마음이리라. 무엇인가를 씻으며 흘러내리는 빗물에서 시인은 <씻김>을 하는 영혼을 느낀 것이다.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 비를 맞으면서 무엇인지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온몸을 적시는 사랑은 자신의 희생을 담보한 것 아닐까.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유명한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은 몇 년에 한 번 비가 내린다. 아무것도 살 것 같지 않은 사막에 비가 내리면 숨어있던 씨앗들이 깨어나 200 여종의 꽃을 피운다. 사막을 화려한 색채로 물들이는 꽃은 자연의 신비와 새로움을 선사한다. 사막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내하며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것 역시 자연의 무한한 사랑 아닐까.

우리의 사랑도 마음속의 사막에 숨어있으리라. 한 번쯤 그 사막을 열고 비를 흠뻑 맞으며 걸어보라. 당신의 가슴에도 사랑의 꽃이 환히 피어날 것이다. 빗방울이 맑은 변주곡을 울린다. 당신의 귀에도 경쾌한 사랑의 리듬이 들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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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