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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다섯이 참전용사… '수난의 역사' 짊어진 지석진씨

모친, 둘째형 유해 끝내 찾지 못하고 타계
성명 잘못 기재돼 최근에야 발견… "허탈하고 안타깝다"
지씨는 베트남전 참전해 경비부대서 임무
"젊은이들 군생활 뜻깊게 보내길 바라"

  • 웹출고시간2022.11.02 18:12:26
  • 최종수정2022.11.02 18:12:26

지석진씨가 "안장자 성명이 잘못 기재돼 사과한다"는 내용의 현충원 서류를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 김민기자
[충북일보] "어머니 살아생전에 찾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둘째 형 '석민'씨의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지석진(80)씨의 시선이 허공에 꽂혔다.

충북 청주시 운천신봉동에 거주하는 지씨와 지씨의 어머니는 6·25한국 전쟁으로 실종된 형제의 행방을 수십년간 찾아 헤맸다.

지씨는 '석영' '석민' '석만' '석해' '석진' '석인' 여섯 형제 중 다섯째다.

석영·석민·석만씨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석영씨의 유해는 1960년대에 찾았다. 모친은 그 후 매년 석영씨의 묘소를 찾아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다.

석민·석만씨의 유해는 찾지 못했고, 모친은 못내 아쉬워하다 1974년 눈을 감았다.

지씨가 석민씨의 유해를 찾았다고 연락을 받은 건 지난달 19일이다.

석민씨의 유해는 석영씨 묘소와 200여m 떨어진 곳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제적부에 이름이 잘못 기록된 탓에 위패에도 잘못된 이름이 기재됐다. 석민씨의 위패에 기록된 성이 '지(池)'가 아닌 '심(沈)'으로 잘못 표기돼 있어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지씨는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전사자의 가족을 찾는 사업에 대한 소식을 접한 뒤정보를 제공했고, 최근 석민씨의 유해를 찾게 됐다.

지씨는 "어머니가 생전에 현충일만 되면 현충원을 찾았다"며 "평생을 석민·석만 형의 행적만 좇으며 살았는데 석민 형을 코앞에 두고 찾질 못했으니 허탈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성이 잘못 표기된 것과 관련해 누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시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런 시대였다"며 "다만 안타까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지석진씨가 운천·신봉동주민센터를 찾아 활짝 웃고 있다.

ⓒ 김민기자
지씨는 전장으로 떠나면서 이별한 형들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지씨가 아랫배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자 형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너나 할 것 없이 들쳐업고 인근 병원으로 뛰쳐나갔다는 것이다.

지씨는 "기억이 흐릿해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거리지만 형들의 애정만큼은 무한정 느낀다"며 "배에 회충이 들끓는 바람에 형들에게 업혀 병원에 이송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지씨가 둘째형 석만씨의 유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유전자 시료 채취와 제적부 조사 등 손에 닿는 모든 노력을 한 뒤 국방부 국군유해발굴감식단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다.

유해 찾기에 여념 없는 지씨 역시 참전유공자다.

지씨는 제대를 4개월 앞두고 베트남전에 참전해 경비부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지씨의 동생 석인씨도 베트남전에 참전해 지원부대에서 근무했다. 여섯 형제 중 다섯 형제가 참전한 보기 드문 사례다.

지씨는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나는 팔다리가 멀쩡하지 않냐"며 "나라를 일으켜야겠다는 커다란 각오보다도 가까운 이웃에게 봉사하고픈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지씨는 참여정부 시절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지씨는 국방의무를 진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지씨는 "지나고 보니 다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젊은이들도 군생활하며 너무 허송세월하지 말고 기왕이면 뜻깊게 보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 2004년 4월에 첫 삽을 뜨고서부터 지금까지 총 1만3천여 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한국전쟁 국군 전사자 중 유해가 수습되지 않은 13만여 명 중 10%에 불과하다. 수습된 유해 중 가족을 찾은 건 200여구 뿐이다.

유전자 시료 채취는 전사자의 친·외가 8촌까지 가능하며 전국 보건소·군병원에서 신청할 수 있다.

/ 김민기자
https://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73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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