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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사랑한 옛 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상세·정밀…고금에 비교될 지도 없어

  • 웹출고시간2008.11.05 19:01:0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길. 요즘처럼 길을 걷기에 좋은 계절도 없을 듯하다. 그 길이 흙내 나는 황톳길이거나 단풍의 아름다운 빛깔로 우거진 숲 속 길이거나, 온갖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길동무가 돼주는 고갯길이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당도해야할 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지극히 자유롭게 그런 길을 마냥 걸어볼 수만 있다면.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꾸어보는 꿈이다.

많은 책들을 보면 숱한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길을 통해서 문학적 감수성을, 예술적 영감을살 찌워 왔다. 여행을 위해 길을 걷거나 사색을 위해 산책하는 것이나, 그런 길 위에서의 여정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보는지. 그것은 문학이 되고 그림이 되고 음악이 되곤 했던 것이다. 길을 걷는 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시간의 흐름으로 버려두지 않고 내면에 무엇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그 길에 대해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다.

종종 박물관에 가면 옛 지도를 접한다. 자동차도 없고, 서양처럼 말이 흔해 말과 마차가 커다란 교통수단도 아니었고, 헬리콥터가 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없고, 대체 우리의 옛 사람들은 어떻게 지도를 그렸을까. 그것이 늘 궁금하다. 오직 발로서 길을 걷고 강을 건너고 산에 오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지도제작자들의 일이 아니었을까.

길과 함께 살고 길과 함께 즐겁고 길과 함께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그 산천의 속속 굽이굽이 길을 그려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니 지도를 그려야 했다면 그 무수한 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 이틀도 아닐 것이고, 때로는 덥고 때로는 추위와도 싸워야 했을 것이며 산속 맹수들의 울음소리와도 맞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 여정은 길을, 자연을, 땅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지도제작자 김정호나, 이름모를 무명의 지도제작자들이 그린 옛 지도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길을 사랑했을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름만 들어도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김정호. 그럼에도 정작 그의 실제적인 기록은 모두가 불투명한 이가 김정호다. 그는 1804년 황해도 토산(혹은 봉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고 186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 그에 대한 전기가 전무한 것으로 보아 그는 양반은 아니었으며 집안 형편 또한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렇게 많은 지리서와 지리를 제작했으면서도 조선의 어떤 문헌에도 그의 생애에 대해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것이 단지 신분의 벽 때문인지, 아니면 훗날 너무나 정확하게 국토를 그려낸 '대동여지도'로 인해 '옥사했다'는 설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유일하게 같은 시대 중인 출신인 유재건(1793~1880)이 남긴 '이향견문록'이라는 글에서 김정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김정호는 본래부터 뛰어난 재주가 많았다. 지리학에 취미가 있어 두루 상고하고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지구도'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각(刻)에도 뛰어나 인쇄한 것이 세상에 퍼졌다. 상세하고 정밀한 것이 고금에 비교될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한부를 얻고서는 참으로 보물로 여겼다. 또 '동국여지고'10권을 편집하였는데 탈고하기 전에 죽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 글을 보면 김정호의 면면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지도의 필요성이나 지도를 그려야한다는 사명감도 중요했지만 그것을 미학적으로 그려내는 재주 또한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지도를 오늘날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가 남다른 목각의 재주가 있어 지도를 직접 판본으로 새겨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후대인들의 복인 셈이다. 어쨌든 그가 제작한 많은 지도 중 '대동여지도'는 지도중의 지도이고 그의 삶의 좌표를 그려낸 예술품이었다.

그림 '대동여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가 무수히 보고 걸었을 길이 보인다. 지리학자로서 걸었던 길이며 길과 산을 그림처럼 새겼던 그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큰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는 서울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1840), 전국지도인 '청구도'(1834), '동여도(東輿圖)'(1857),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1864)를 제작했으며, 전국지리지인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점(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도에 대지(大東地志)"(1861∼1866)를 편찬했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김정호가 만든 지도들은 전도(全圖)이다. 전도는 우리 나라 전체를 그린 지도이므로, 다른 어느 유형의 지도보다도 우리 나라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지도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 국토 전체의 모습이 어떤 형상인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발달했던 군현지도, 방안지도(경위선표식 지도), 목판지도, 절첩식지도, 휴대용지도 등 여러 지도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전국지도들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정호가 만든 지도가 그 정확성에 있어서 특히 뛰어났던 것이다. 또 김정호 지도제작 특징은 지도의 여백이나 지도 안에 다양한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다. '청구도'에도 군현의 이름 옆에 인구, 전답, 군정(軍丁), 곡식, 별칭, 군현품계,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써 넣어 지도가 복잡하게 보였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글씨를 가능한 한 줄이고, 표현할 내용을 기호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해 현대 지도와 같은 세련된 형식을 보여 주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산맥이 가장 강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이유는 산을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하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산줄기를 가늘고 굵게 표현함으로써 산의 크기와 높이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지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강과 물의 경계와 산줄기가 이를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대간(大幹)을 가장 굵게, 다음으로는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큰 강을 나누는 정맥(正脈)을 굵게 그리고, 정맥에서 갈라져 나간 줄기를 그 다음으로 굵게 표현하는 등 산줄기의 위계에 따라 그 굵기를 달리 하였다. 또 이 '대동여지도'는 분첩절첩식 지도로 보거나 가지고 다니기에 매우 편리하다.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전국지도가 되도록 했다. 1층(첩)의 지도는 동서로 80리 간격으로 구분해 1절(折 또는 1版)로 하고 1절을 병풍 또는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지도로 만든 것이다. 22첩을 연결하면 전체가 되며, 하나의 첩은 다시 절첩식으로 접혀져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형태이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인쇄된 지도여서 지도의 대중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는데 절대적이었으며 가장 정교하면서도 품격을 갖춘 지도로 전해진다. 지도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목판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선명함을 지니고 있다. 정밀한 도로와 하천, 정돈된 글씨와 기호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 있는 산줄기의 조화와 명료함은 다른 어느 지도도 따를 수 없는 판화로서의 뛰어남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산자 김정호는 위대한 지도학자이면서 훌륭한 전각가였으며, 지도의 예술적 가치를 실현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지도의 미적 품격을 추구했던 모습을 통해 지도를 예술로 인식, 승화하려 했던 김정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김정호는 '청구도' 범례에서 "산마루와 물줄기가 지면의 근골과 혈맥"이라 했다. 땅에 대한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국토관이자 자연관이며 이것이 지도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녔던 산천에 대한 인식을 지도화한 것으로, 지도가 단순히 실측이나 군사 도구로서의 지도가 아니라 길을 사랑하듯, 세상을 사랑하는 김정호 사상의 투영이자 정신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림 '대동여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가 무수히 보고 걸었을 길이 보인다. 지리학자로서 걸었던 길이며 길과 산을 그림처럼 새겼던 그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그 길들을 걸었을까. 이 일은 세상을 한 발 앞서게 한 일이며, 예술이다. 그의 혼과 몸을 바쳐 만든 지도가 예술이 아닐 수 없고,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가 닿을 수 없는 경지이며 한 폭의 그림이었다.


김정애/ 문화담당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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