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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그의 꿈을 아오? ’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그림” 1. 정조대왕필(正祖大王筆) 파초도(芭蕉圖)

  • 웹출고시간2008.06.07 01:11:2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앞만 보고 달리며‘문명의 발달’을 한없이 내세우는 세상이다. 덕분에 지구촌 곳곳에서 대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를 거역한 대가인지 모르겠다. 이제 조금씩 천천히 가자. 그림도 보고 책도 보고 생각도 하고, 그렇게 문화를 만들어가면서 천천히 가야할 때다. 그렇게 가자고 ‘문화기획-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그림’을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그린 사람의 심성이나 바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오래된 그림일 경우 그 시대의 사람살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저울이 된다. 옛사람들의 다양한 그림을 통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활과 문화, 풍속, 정신세계 등의 체취를 느껴보려 한다. 그들의 세상사랑을 통해 오늘을 반추해보자는 것이다.
조선시대 화첩을 넘기다 손가락이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이고 이미 잘 아려진 그림임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산하게 다가온 그림이다. 정조대왕이 그렸다는 ‘파초도(芭蕉圖)(보물 743호)’다.

정조 (1752년~1800년)

정조는 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조선 개혁’으로 풀어보려 몸부림쳤던 왕이다. 왕권을 강화하고 젊은 실력 있는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고자 규장각을 설치해 조선 개혁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고자 한 왕이다.

신분제도의 악습인 서자차별을 철폐하고 그 질긴 신분제의 악습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려 했다. 이러한 개혁을 완성하기위해, 한양으로 집중된 권력을 수원으로 옮겨 민의를 좀더 살피기 위해 화성 건축을 추진했던 진보적인 왕이었다. 당파나 당쟁을 불식시키고, 진정 민중들의 삶을 염려했던 왕은 그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48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선은 다시 혼돈 속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의 개혁은 농민들의 몫이 되었다.

다시 정조는, 문화의 발전이 백성을 일깨우고 나라의 발전을 이룬다는 수순을 알고 있던 왕이다. 일찌감치 도화원을 열어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밥을 먹고 살도록 했으며 그림이 단순한 취미가 아닌, 직업의 세계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왕 스스로도 글씨와 그림을 배웠으며 그 안목이나 솜씨가 역대 어느 왕 보다 탁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일까? 당대의 어떤 산수화나 풍속화보다도 그만의 정갈한 화법이 눈에 띄었다.

역대 왕이 쓴 글씨는 많이 보지만 그림을 그린 왕은 보기 드물다. 특히 그 그림이 뛰어나 후대에까지 전해진 그림은 흔치 않다. 그 흔치 않은 그림중의 하나가 정조의 ‘파초도’고 그것이 세상에 남아, 그림이 담겨 있는 화첩에 애지중지하는 책갈피를 꽂아두게 된 것이고 , 오늘 문득 정조대왕이 그립다.

‘파초’를 입에 읊조리면 무조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중학교던가, 고등학교 던가. 그 교과서에 나와 시를 통째로 암기하면서 주제나 소재를 이해하고 내용을 마음에 심기위해 무던히 노력하던 김동명의 시 ‘파초’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중략)/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대략 이랬다.

이 시를 접하면서 식물 ‘파초’라는 것이 더운 지방에서 살 것이라는 생각, 잎사귀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넓적할 것이라는 생각, 조국을 잃은 시인의 마음이 외롭고 슬픈데 그것이 파초와 닮은 모양이라는 생각들이었다. 당시 막연하게 파초라는 식물에 대해 궁금했지만 그 꽃의 실체를 보고 넘어가지 못했다. 그만큼 호기심이 덜했으리라.

다시 ‘파초’라는 식물에 관심을 주었던 것은 80년대 후반쯤 ‘수와 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파초’때문이다.

‘불꽃처럼 살아야 해/ 오늘도 어제처럼 / 저 들판의 풀잎처럼/ 우린 쓰러지지 말아야 해/ ...... 정열과 욕망 속에/ 지쳐버린 나그네야/ 하늘을 마시는/ 파초의 꿈을 아오/ 가슴으로 노래하는 파초의 뜻을 아오’

이 노래는 왜 그리 애절하던지. 그 어떤 시어보다 의미 있는 말의 잔치였다. 파초가 불꽃같은 열정이 있는 식물이던가, 절망과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그런 강한 상징성을 가진 식물이던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파초라는 것이 무엇이 길래, 그토록 아름다운 가사를 쓰는데, 그 상징으로 사용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또 세월과 함께 파초의 호기심은 심드렁하게 사그라졌다.

정조대왕필(正祖大王筆) 파초도(芭蕉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84.6x51.6cm. 보물 743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 후 다시 조선시대 화첩을 보면서 ‘파초’를 만난 것이다. 그 그림이 유독 보기 좋아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그것이 당대 유명하던 화가 정선이나, 신윤복이 아닌, 정조가 그렸다는 사실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그리고 정조는 왜 ‘파초’여야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그림에 책갈피를 꽂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문득 김동명의 ‘파초’와 수와 진의 노래가사 ‘파초’가, 정조의 이 그림 ‘파초도’가 결코 우연히 생성된 것이 아닌, 무엇이 들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우선 그림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화면은 군더더기 없이 아주 정갈하다. 뒷 배경 조차 없다. 그런 단아한 화면에 바위(화첩의 설명)가 있고 그 곁에 파초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것은 자라고 있는 현재형처럼 느껴진다. 그 만큼 파초의 존재가 그 자리에 실제하고 있는 것처럼 입체감이 뛰어나게 그렸다. 결코 사실을 그린 세밀화는 아니면서도.

화첩의 자료에서 밝힌 그 바위라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파초아래 왼쪽으로 있는 그림이 과연 바위일까?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바라보기에 따라 파초의 그림자 일수도 있고 파초 아래 있는 흙이나 잡풀의 부분을 화면 구도를 위해 의도적으로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이정도의 그림솜씨라면 누군가에게 제대로 그림 수업을 받았을 테고 그림을 그릴 당시만 해도 정조의 그림에 대한 안목이나 그림을 그리는 솜씨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놓은 경지에 이른 듯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위 곁의 파초는 맨 위의 긴 잎사귀는 진하고 그 다음은 조금 덜 진하고 아래 잎은 연하다. 또한 자연스러운 붓질을 여러 번 한 끝에 울퉁불퉁한 파초의 줄기가 형성되었고 한점 붓 끝으로 몽우리를 만들었다. 화면 왼쪽 위에는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있다. 마치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씨를 쓰듯 단조롭고 가벼운 붓 터치로 완성한 그림이다.

파초의 입체적인 느낌은 순전히 먹의 농담으로 조절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림에 파초만 덩그마니 그려졌다면 파초의 느낌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초아래 바위인지 흙인지가 아주 간결하면서도 정갈하게 균형을 맞춰주어 그림이 전체적으로 완성도 있게 마무리된 듯 하다. 격조 있는 한 폭의 문인화다.

정조는 왜 파초를 그렸을까? 파초에 관한 한 가지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서예가 회소(懷素)는 종이를 살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파초를 심어 그 잎을 따서 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파초는 생활이 어렵지만 뜻을 잃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파초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사군자, 소나무, 오동나무 등과 함께 8폭 이상의 병풍에 자주 그려지는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왕필(正祖大王筆) 국화도(菊花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51.3x86.5, 보물 744호, 동국대학교 발물관 소장.

현재 전해지는 정조의 그림 중에 ‘파초도’와 비슷한 화법으로 그린 그림으로 ‘국화도(보물 제 744호)’가 있다. 화면 왼쪽에 치우쳐 그린 바위와 풀 위에 세 방향으로 나 있는 세 송이의 들국화를 그린 그림이다. 독특한 구도이면서 안정감을 주는 화면이다. 돌과 꽃잎은 묽은 먹으로, 국화잎은 짙은 먹으로 표현하여 구별하였는데, 이러한 농담 및 강약의 조화를 통해 들꽃의 강한 생명력을 표현했다.

이처럼, 정조가 그린 그림들이 뜻을 꺾지 않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파초나 강항 생명력을 상징하는 들국화인 것은, 정조가 지향한 이상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혹은 서화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즐길 줄 아는 예인으로서 파초와 들국화를 화두로 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파초와 들국화를 그리며 정조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그 이상을 구상했을 터이며, 백성의 주인으로서 어떻게 백성들을 이끌어 갈 것인가를 고민했을 터이다. 그 대답이 바로 어떤 불의에도 뜻을 꺾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일 테고,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정신일 것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문화를 권장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겠다고 안간힘 썼던 왕의 모습이 보이는 그림이다. 어진 임금 아래 어진 백성과 어진 나라를 만들고 싶었던 정조대왕.

조선을 거쳐 그 어려운 일제강점기를 넘기고 험난한 전쟁의 고비도 넘기고 현대에 이르렀다. 단지 먹과 종이와 붓이 있고 그 위에 몇 번 자유롭게 붓질만을 했을 뿐인 ‘파초도’. 그 간결하고 단아한 자태를 닮은 왕은 이 시대에 정령 나타나 주지 않으려나 보다. 이 혼란스러운 시절에, 문득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하던 시인의 마음이나, ‘우린 쓰러지지 말아야해’하는 노래의 가사처럼, 흔들리지 않고 살고자하는 젊은이들의 이상을 노래한 ‘파초’의 상징성이 그리울 따름이다.

정조는 문화의 가치를 알았던 임금이면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할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임금이다. 그가 남긴 ‘파초도’를 보고 또 보며 그를 닮은 이시대의 왕을 꿈꾸어 본다.


/김정애 (소설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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