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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의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조선시대 '여자의 굴레' 시·그림 통해 벗어던져

  • 웹출고시간2008.08.13 18:48:4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집 앞에 포도밭이 있었다. 날이 가물어 포도밭에 물을 대야 한다고 밤에 아버지가 우물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두레박 우물을 시멘트로 덮고 펌프를 달아 놓았던 터라 펌프질하는 일이었다.

아버지 하는 일이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고 아버지 일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키가 작아 펌프질이 힘들어지자 시멘트로 덮은 우물 위로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펌프질을 하겠다고 잔꾀를 부렸다. 얼마 되지 않아 우물위에서 고꾸라져 우물바닥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다.

그 밤에 아버지 자전거에 매달려 면단위 의원에 갔고 의원이 들고 있는 바늘을 보자 아프다고 포악을 썼다.

결국 생으로 몇 바늘을 꿰맸다.

이튿날, 이마에 몇 바늘 꿰맨 것은 엄살이 되어 학교를 가지 않는 구실이 되었다. 생전 못해본 것처럼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며 응석을 어찌나 부려 댔던지. 밤새 못준 포도밭의 물을 대는 아버지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날 포도밭 이랑에서 내 평생 얻은 게 하나 있었다.

“여자도 꿈이 있어야 한다. 이담에 커서 직장생활을 하면 더 좋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자 기자 정도면 좋겠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아니고 여자 기자라고 말해 준 것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때 여자 아나운서라고 말했으면 나는 어쩌면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그때 아버지가 기자라고 말해준 것은 거울속의 얼굴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그것이 꿈이 되었고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는 것은 진정한 복이다.

허난설헌의 글과 그림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22x22.5, 개인소장.

당시 시대의 풍속과 맞지 않게 여자에게도 글공부를 시켜준 자유로운 집안의 분위기와 그런 환경에서 유복하게 자란 허난설헌의 유년시절을 상상해볼 수 있는 그림이다.

여자에게, 여자의 꿈이란 대체 무엇일까.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가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뜨고 있다. 자식들을 모두 키워 출가시켜 놓은 60세의 여자가 “이젠 나를 위해 살고 싶다.

나도 한 때는 꿈이 있었고 자존감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방치하고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선다. 가족들에게 그것은 반란이었다.

현실은 어떤까. 대부분의 여성들에게(혹은 남성일수도 있다) 그것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이야기다. 누구나 그것을 꿈꾸지만 현실을 박차고 내 인생을 찾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흔치 않다. 아니, 앞으로 드라마의 영향으로 자아를 찾겠다고 독립을 선언하는 여성(혹은 남성)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황혼이혼이나 20수 이혼(자녀가 대학 진학하는 시점)이 늘고 있단다. 아무튼 세상은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고,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헌신짝 버리듯 내 팽개쳐 놓고 살지는 않는 다는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기 400여 년 전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유교라는 법과 질서로 굴레를 씌운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것을 평생 한스러워 했다. 자신보다 그릇이 작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작은 남편 김성립의 아내인 것을 한스러워 했고 어찌하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을 연이어 앞세우게 된 것이나, 자신에게 꿈과 재능을 물려준 친정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화를 당하게 된 것이나, 주어진 모든 현실이 한스럽지 않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불우한 삶을 살수 있을까. 그 여인은 결국 삶의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홀연히, 27세의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마쳤다. 그 여인의 이름은 눈 속에 핀 난처럼 세상에서 가장 슬프지만 고혹적인 여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 上樑文)’, 29.8x20.5, 목판본, 허미자.

허난설헌이 8세 때 지은 산문으로 신선세계에 있다는 광한전백옥루 상량식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글을 지었다고 한다. 이글은 훗날 허균이 한석봉에게 글을 쓰게 하여 목판본으로 새겨 찍어 많은 중국의 시인들이 간직할 정도로 유명한 글이다.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강원도 강릉출생으로 허엽의 딸이고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의 누이이다. 누대의 문한가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한 양천허씨 집안에서 난 허난설헌은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시.서.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어서 천재소리를 듣기 시작했으며 허씨집안과 친교가 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15세에 안동김씨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한량기질이 있던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 늘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더욱이 질병으로 두 아이를 연이어 잃게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친정 오라비들이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시름을 달래기 위해, 시대에 항거하는 몸짓으로, 절절한 마음으로 시를 짓던 그녀는 끝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했다. 여인은 죽기 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동안 쓴 시와 그림을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는데, 동생 허균이 그녀의 글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여 중국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이러한 질곡 많은 삶이 만들어낸 주옥같은 글은 허균이 명나라 주지번에게 주어 ‘난설헌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간행되어 현재에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213편의 시가 들어 있는데, 이중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에 이른다. 그만큼 현세의 삶이 힘겨워 신선의 세계를 꿈꾸었고 오히려 살기보다는 죽음을 갈구했던 마음을 잃을 수 있는 대목이다.

차라리 꿈과 재능을 거침없이 드러내게 해준 유년시절이 없었다면, 그저 당대 규율에 맞게 여필종부니, 남존여비니 등에 순응하며 현모양처의 소양이나 갖추며 살았더라면 그토록 고통스러운 한을 품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는 만큼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아는 만큼 고통스럽다는 말은 이 여인 난설헌을 두고 나온 말인 듯 하다.

당대 조선사회라는 것은 중국의 성리학을 무조건 받아들여 그 법과 질서와 규율로 사회를 통제하던 시절이었고 여기에 가장 희생된 계층이 여성이었다. 결혼제도 조차 남자가 장가를 가던 풍습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여자가 시집을 가는 형식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던 그 경계지점에 있던 시절이었다.

추측컨데, 이전에는 적어도 허난설헌이 겪은 남녀차별에 대한 악습은 없었으며 오히려 여성 중심의 사회였던 것이다. 혼란스러운 경계지점을 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변모하고 있었고 그 변화의 휘용돌이에 희생된 이가 난설헌이었던 것이다.

허난설헌을 연구한 한 책을 넘기다 그녀가 그린 그림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를 보았다. 그동안 그녀의 한을 통곡으로 쓴 시만을 접하다 그녀가 그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유년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가 꾸었던 꿈이 되새김질 되었다.

보통의 명문가처럼 여성을 유교적인 관습에 묶어 두지 않고 오빠와 동생이 글공부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준 집안의 자유스러운 분위기. 이점을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이것은 훗날 허균이 세상을 바꾸려한 사상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그림이나 들여다보자.

그림은 그저 한가롭고 넉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왼쪽에 잎이 진 앙상한 나무가 가을이 깊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잎은 졌지만 그 나무들이 어찌나 견고하게 서 있던지. 하늘은 새들이 날고 있고 그 새들이 나무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 나무 아래는 글공부하는 초가 정자가 있고 나이든 아비일까, 글을 가르치는 스승일까. 그저 하늘을 보며 새와 소통하고 싶은 아이와 손을 잡고 한적한 한때를 즐기고 있다.

화면의 구성을 위한 것인지, 꿈과 희망과 삶의 풍요가 있던 어린시절의 한 전형을 표현하기 위함인지. 마당에는 닭 두 마리가 역시 아이를 향해 있고 멀리 산과 들이 화면의 안정감을 가져다주도록 배치돼 있다. 튀지 않는 다정다감한 색채로 한가롭고 정겨운 정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이다.

이 한 장의 그림으로 허난설헌의 유년시절이 보이는 것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글을 읽게 한 아버지나, 서슴없이 시와 그림을 짓도록 허락한 집안의 분위기. 결혼해 이 집을 떠나면서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어진 허난설헌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유년의 풍경이다.

그녀가 자식들을 앞세우고 울부짖듯 노래한 시 ‘곡자(哭子)’가 여기 있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시대가 변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을 반성해본다.

자신의 운명 앞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친 조선의 한 많은 여인, 난설헌이 있었기에, 그녀가 남긴 통곡의 시들을 불태우지 않고 지켜낸 허균이 있었기에, 오늘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정애 (프리랜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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