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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글씨

‘안분(安分)’과 ‘각고(刻苦)’, 세상을 디자인하다

  • 웹출고시간2008.07.09 22:22:4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위대한 ‘한글’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 되어 옷감이나 건축자재, 생활용품 등에 활용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특히 현대 미술가들이 한글이나 한자, 영문 등 글자를 오브제로 이용해 작품화 하는 것, 또한 오래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이들은 이미 옛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글자체를 새롭게 각색하거나, 현대의 서예가나 디자이너, 혹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살려 새롭게 창작하는 것이다.

글자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개념을 넘어 시각적인 이미지 전달을 위한 디자인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현대에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역대에 수많은 문인들의 글자를 보면 모두 형태가 다르다. 시대나 환경에 따라 다르고 글쓴이의 개성이나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글 쓴이 만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면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글자를 보면 그것이 글자라는 생각보다는 한 폭의 그림으로 비쳐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단지 한 폭의 그림도 아니다. 한 획 한 획 그어진 선과 붓의 휨에서 느껴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붓의 시작과 그 끝이 하나의 입체적인 그림 같아 여러 획이 들어간 한 글자에서 여러 장의 그림을 상상해 내곤 한다. 도대체 무슨 글자가 이렇듯 신기할 수가 있던가.

‘안분(安分)’, 지본묵서(紙本墨書), 22x40.5cm, "삼선생필첩(三先生筆帖)”, 송준호 소장.

지난 겨울이다. 우연히 우암 송시열(1606~1689)의 후손 송영달 옹으로부터 ‘한국 서예사 특별전 송준길. 송시열’(서울 예술의 전당 기획)도록을 선물 받게 되었다. 우암의 글자라면 이미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전시된 ‘우암 송시열’특별전(2007년 10월)을 통해 익히 감탄하며 그의 힘 있는 필체에 경의를 표한바 있다. 당시 전시된 ‘화양(華陽)’(군자의 도가 사라졌다가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상징을 담은 뜻)이라는 글자가 얼마나 많은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았던가.

그러던 차에 받은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송준길. 송시열전’ 도록이 딱히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도록을 넘기다 새로운 글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암이 쓴 ‘안분(安分)’과 ‘각고(刻苦)’라는 글자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글자 안분(安分)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술작품이다. 갓머리변의 한 획은 노련한 무용수가 몸을 엎드려 허리를 펴고 다시 힘차게 몸을 솟구쳤다 다시 허리를 휘는 동작이다. 갓머리 아래 계집녀(女) 역시 두 무용수가 교차하며 혼을 불사르는 것 같은 몸짓을 하고 있다.

분(分)의 여덟팔(八) 변 왼쪽 삐침은 무사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고 있으며 오른쪽 삐침은 하늘로 오르는 무사와 대적하기 위해, 그 무사를 막아보기 위해 허공으로 차올라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 칼도(刀)왼쪽 삐침과 휘어진 굵은 붓질 역시 날렵한 힘과 우직한 힘이 겨루는 것 같기도 하고 날렵함을 떠받치고 있는 무사의 몸짓 같기도 하다. 한 글자에 부드러운 곡선과 날렵한 강기와, 또 그 안에 격렬하게 휘어진 힘과 춤추는 여인네의 한스러움과, 휘어짐의 고통을 견디는 인고의 몸과 자유롭게 치닫는 젊은 무사의 혼이. 글자가 갖고 있는 의미를 떠나 보이는 형태만으로 무수한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글자 ‘안분’을 접한 것이다.

‘각고(刻苦)’. 지본묵서(紙本墨書), 164x82cm, 김명성 소장. 우암의 글‘안분’과‘각고’는 글자를 통해 무수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의 보고로 우암의 영혼과 그의 무한한 정신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그만의 예술작품이었다.

글자 ‘각고(刻苦)’는 또 어떠한가. 각의 오른쪽 칼도(?)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 한 몸이 되어 왼쪽 돼지해(亥)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다. 위에 한점을 찍고 다시 붓질을 시작한 돼지해는 어깨를 비틀며 돌아설 것 같은 춤꾼의 뒷모습을 닮았다. 바로 빠른 동작으로 전환할 것 같은 춤사위로 속도와 힘이 느껴지는 붓질이다.

고(苦)의 위 획 풀초(?)에서 왼쪽 삐침은 하늘에서 혜성이 떨어지는 모습과 같다. 아주 독립적이면서도 오른쪽 획을 보면 거친 용의 머리가 불기운을 뱉어 낸 것이 아닐까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용의 머리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진 붓질은 불을 뱉어낸 용의 트림처럼 용솟음치다 아래 열십(十) 획에서 마무리된다. 마지막 입구(口)에서 모든 현란함을 잠재우고 고요해지면서 안정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전시 일정을 보니 곧 끝나가고 있었다. 고속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었다. 기필코 눈으로 확인하리라. 서예박물관을 가득 채운 두 사람의 범상하지 않은 글자들이 온 벽을 에워싸고 있어 어리둥절했다. 한지에, 그저 검은 묵을 찍어 붓질을 한 것일 뿐인데, 그것이 살아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 곁에 와 있었다. 넓은 공간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글자 ‘안분’과 ‘각고’를 찾아 헤맸다. 어느 방에 그것이 걸려 있었다. 하늘로 치솟듯 날렵한 몸 재주를 가진 무사와 진심을 다해 춤을 추는 노련한 무용수가 소박한 한지에 그려 있었다.

아, 글씨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그것은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단순히 옷이나 가방, 인테리어나 생활용품에 활용한 디자인으로서의 글자가 아니라, 글자를 통해 무수한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의 보고였다. 그것은 글을 쓴 우암의 영혼과 그의 무한한 정신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그만의 예술작품이었다.

우암은 그 글자 안에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을까.

조선 최대의 문집인 우암의 ‘송자대전’(215권 102책)에 담겨 있는 시문 ‘벼루(현)’와 ‘붓(筆)을 보면 그가 글을 쓰는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외부는 방정하여 바뀌지 않고/ 내부는 비어서 먹물을 용납하네./ 오직 부지런히 세탁해서/ 끝내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소. -‘벼루’-

몸이 예리하고 동작이 빈번하여/ 장수를 누리지 못함이 당연하네./ 이를 경계로 삼아서/ 오직 인(仁)을 힘쓰게나. -붓‘-

위 두 글은 우암이 1666년 3월에 낙향하여 산중에서 생활하는데 홍사군 군서가 매일 사용하는 일곱 가지 물건(벼루, 붓 등)에 대해 명(銘)을 청하자 우암이 두 구 씩 엮어 당시 현감이었던 홍석에게 준 것으로 전해진다.

방대한 분량의 문집을 남긴 우암은 하루에도 몇 통씩 편지를 썼으며 지인과 자손들에게 수 많은 시문과 다양한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시문 ‘벼루’를 보면 묵직하고 별 치장은 없으면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글 쓰는 이의 수족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벼루에 먹물이 비지 않도록, 먼지가 끼지 않도록, 오직 부지런히 글을 쓰라는 것으로, 당대의 모든 선비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아닐는지.

시문 ‘붓’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장수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거울삼아 오직 어진 것을 위해 힘쓰라고 당부하고 있다. 몸이 예리하고 동작이 빈번하다는 표현은 우암의 글 쓰는 스타일을 스스로 함축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글자 ‘안분(安分)’은 한자의 풀이대로 ‘자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여겨라’하는 뜻이다. 글자의 의미 역시 우암의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글자 ‘각고’는 주자가 그의 아들과 문인에게 남긴 ‘근근(勤謹)’(부지런하고 삼감)과 ‘견고각고(堅固刻苦)’(뜻을 굳게 갖고 열심히 노력함)를 우암이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다 뒤의 글자 ‘각고’를 문인 유명뢰에게 써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 두 단어가 갖고 있는 뜻이 어디 비단 400년 전 우암의 시절에만 해당되는 얘기일까. 오히려 현대에 와서 그 뜻을 더 가슴에 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암의 조언대로 자신의 앉은 자리가 최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불행할 것도, 이 세상에서 죄지을 것도 없겠으며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결코 세상도 무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김정애 (소설가·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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