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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 박물관 소장의 ‘관동팔경’

벽장속의 그림 민화, 현대 추상회화의 산실

  • 웹출고시간2008.07.16 20:05:1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관동팔경도’

종이에 묵, 8폭 병풍 각 105x43cm, 에밀레 박물관 소장.

언젠가 괴산에 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으로 취재갈 일이 있었다. 아마도 10여 년 전 쯤이다. 그 집은 조선 말기까지 큰 벼슬을 지낸 인물이 살았으며 일제 강점기를 맞아 후손들이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고 덕분에 가세를 돌보지 않아 집안은 점점 기울었다.

그 시대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의 대체적인 집안의 분위기였다. 그 가세라는 것이 비단 재산이나 사람만을 잃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 가문을 버티어 온 오래된 고택(古宅) 또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일본으로, 일제의 순경들을 피해 다니는 주인을 잃어버리면 더불어서 힘을 잃는 것이다. 기와가 깨지고 흙벽에 금이 가고 서까래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결국 집이 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사람의 온기가 없으면 바로 폐허가 되고 들고양이나 들쥐들의 놀이터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 한 집이 그러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대청마루에 할머니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죽부인을 안고 낮잠을 잤을 그런 공간이었고 안방에는 십장생 병풍이나 안방마님이 좋아하던 화조화나 산수화 그림들이 어딘가에 붙여 있었을 공간. 사랑방에는 벼슬한 선비답게 멋스러운 문인화 병풍이 둘러쳐져 있었을 테고 책장과 책을 보는 서안이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공간이 주인을 잃으면서 폐허가 되고 어느 날부터 조금씩 허물어 졌을 테고 취재차 그 집을 갔을 때는 안채의 절반이 이미 주저앉아 있었고 그 집안 후손의 한분은 사랑채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실로, 역사의 휘용돌이라는 것을, 한 집안의 기움을 이토록 리얼하게 한 장면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할 만큼, 그 허물어진 집은 그 집안의 역사를 한눈에 상징시켜주는 일이었다. 들고양이가 되어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대청마루를 딛고 올라섰다. 호기심이었다.

혹시 과거 이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한 귀퉁이를 엿볼 수 있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 아무리 호기심이 깊다 한들 너무나 두껍게 쌓인 먼지나 들쥐들이 배설해놓은 것들을 헤집으며 무슨 탐정처럼 파고들 수는 없었다. 한바퀴 휘둘러보고 돌아서려는데, 그 쾌쾌하고 칙칙한 방에서 거미줄이 이리저리 엉키어 있는 그 방 한 귀퉁이 찢어져나간 벽지에서 책 속에서나 보았음직한 ‘벽장속의 그림’이라는 것을 본 것이다.

우리의 민화라는 것의 출발은 그림 솜씨 있는 민중들이 집안을 좀더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 꽃이나 동물, 나무, 혹은 정물들을 그려 벽에도 붙이고 문에도 붙이고 옷장 한 귀퉁이에도 붙여 놓곤 하던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계절에 따라 다르게 그려 붙이며 집안의 변화를 주기도 하고 그리는 이나 주인들의 생각이나 취미에 따라 새나 호랑이 같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집안 정원에 핀 꽃을 그려 붙이기도 했다.

직업적인 화가들이 아닌 순수한 민간인들이 취미삼아 그린 그림이라 하여 민화인데, 감상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집안의 장식을 위한 그림이어서 많은 민화들이 벽지 속에 덧 씌어져 사람들의 살이에, 세월에 묻히게 된 것이다.

‘금강산도’

종이에 채색, 에밀레 박물관 소장.

그러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민화의 수준이 여느 환쟁이들이 그린 그림 못지 않아 지면서 그린이 들끼리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고, 집안을 장식하는 정도에서 발전해 공공기관이나 사찰 등의 실내를 장식하는 그림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순수하게 민중들의 자연스러운 의식에서 출발한 민화여서 중국의 화풍이라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 또한 한국민화의 고유한 특징이다.

애석한 것은 이러한 한국적인 정서를 고스란히 갖고 태어난 한국만의 그림인 민화가 근대라는 여정을 거치면서 서양 꽃그림 벽지에 밀려 많은 민화들이 벽지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 민화의 애달픈 역사를 괴산의 허물어져 가는 고택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안채 안방다락문을 아예 밀봉했었는데 그 밀봉한 부분이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고 서양벽지 속에 드러난 특별한 그림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떨어져 나간 벽지를 잡아 뜯었지만 그림 전체를 볼 수는 없었는데 화사한 연꽃그림이었다. 막연하게나마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벽장속의 민화 그림이라는 것만을 확인해 볼 뿐이었다. 민화를 접하면 그 시절, 그 허물어져가는 고택을 바라보았던 안타까운 마음이 늘 여운으로 남아 있다.

기가 탁 막힐 만큼 독특한 민화를 접한 것은 일본에서 발행한 ‘조선의 민화(상,하)’전집이다. 한권에 320여점의 민화가 수록돼 있고 일부 한국인 소장본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인소장으로 표기 돼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의 문화관련 인사들이 한국의 산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우리의 문화를 연구하고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그림과 도자기, 목가구 등을 집어 간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문화의 절정들은 그 시절에 이미 일본 땅 어느 깊숙한 곳에 감춰졌는지 모르겠다.

이 민화집도 그 시절 일본으로 간 수많은 그림중의 일부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글을 모르니 한국의 민화를 어떻게 설명해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한국인들이 수집해 만들어놓은 책에서 보지 못했던 독특한 그림들이 눈길을 끌어 식민지시절을 겪은 통분이 다시 끌어 오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보아온 민화는 괴산의 한 고택에서 언뜻 본 것처럼 정원의 화초나 곤충을 그린 초충도, 호랑이와 까치그림, 사랑방 풍경을 소재로 한 책거리 그림, 일반 풍경을 그린 산수화 등이다. 이런 그림들은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사물을 그대로 재현한 것 이상의 느낌은 없다, 단지 아름다운 꽃이구나 영특해 보이는 고양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어쩌면 이런 민화의 특성 때문에 순수 예술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만든 도록을 보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민화의 세계가 더 다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장자가 한국의 조자룡박사가 세운 에밀레 박물관으로 돼 있는 그림 몇 점이다. 생전에 한국 문화의 원형을 보존하는 일에 생을 걸었던 조자룡박사가 일본에 있던 그림을 사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에밀레 박물관 소장의 그림 ‘관동팔경’은 8폭 병풍으로 각기 105x43cm로 종이에 그린 그림이다. 한지에 먹의 농담만으로 그린 이 그림은 관동팔경의 사실적인 아름다운 경관이 모두 배제되고 지극히 단순한 현대 추상화 같은 그림이다. 한 폭의 화면에 산과 들과 정자와 나무와 꽃ks과 풀을 모두 그려 넣었지만 그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으며 솜씨 안 좋은 어느 이름모를 민화가가 그렸다고 하기에는 먹의 농담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절한 그림이다.

사랑방문화의 상징인 책거리 그림이 이미 현대 추상화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기창이나 박생광이 민화적으로 그림을 그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관동팔경’이나 다른 에밀레 박물관 소장의 ‘금강산도’를 보면 기존의 서양화가 갖고 있는 원근법이니 투시도니 하는 형식들을 뛰어 넘어 한 폭의 형이상학적인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눌하고 촌스럽다면 솜씨 없는 어느 이름모를 민중이 장난삼아 그린 그림으로 제쳐두겠지만, 그것이 현대의 그 어떤 그림보다 탁월한 조형적인 감각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냥 그대로 봐주면 될 듯하다.

비록 이름 없는 민중이 그린 그림이지만 그 민중은 세상의 풍경을 다르게 본 것이다. 셈세한 풀잎의 결이나 색채를 생략하고, 기와지붕의 수려한 곡선미를 생략하고, 그린이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저 붓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세상의 한 풍경을 그려낸 것이다. 이런 그림이야말로 그린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진짜 그림이 아닐는지.


/김정애 (소설가.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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