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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먹이 만들어낸 비 내린 인왕산의 고적함

  • 웹출고시간2008.10.19 19:10:0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옛 그림이 신비로운 것은, 다른 색채를 쓰지 않고도, 오직 단지 먹의 농담만으로 산과 들과 사람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분위기 또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다다르기 까지, 옛 화인들은 그리고 또 그리는 자기 수련이나 사물을 보는 관찰의 힘이나 그것을 두고 보고 생각하는 사색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의 깊이를 키워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하나, 그림의 대상인 산과 들과 꽃과 사람을, 세상의 다양한 풍속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 대상에 깊이 빠져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이 그린 여러 산들을 보면 정선은 비행기라도 타고 하늘을 날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마치 산 위 더 높은 곳에서 산 아래를 훤히 내려다 본 것처럼 그 산의 넓이와 깊이와 웅장함이나 하는, 그 특징을 잡아 한 장의 화폭으로 그려낸 정선의 산들은 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느끼게 한다.

때로는 중심의 뾰족한 산 봉오리를 향해 주변의 작은 봉오리들이 내달리듯 치닫고 있으며, 때로는 하늘의 여신 수십 명이 내려와 치마폭을 흘러내리듯 입고 정렬해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거대한 공룡이 등줄기를 보이며 엎드려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그는 이 거대한 산의 전체를 어떤 시각으로 관찰하고 보고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전체를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선. 그를 두고 흔히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화가, 조선 산수화의 전통을 바꾼 화가, 조선 강산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그것의 참모습을 그린 화가 등으로 회자된다. 대체 진경산수화란 무엇이며 그가 바꾸고자한 조선의 산수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대략이나마 들여다보자.

정선은 한양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자랐고 누구보다 한양의 여러 가지 풍경들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의 도읍인 한양의 백악산(지금의 북악산)과 웅장하고 굳건해 보이는 인왕산, 다소곳한 남산, 유유히 흐르는 한강 등을 좋아해 그들의 풍경을 자주 그렸다.

‘삼승조망도’

인왕산자락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바라본 풍경 ‘삼승조망도’(비단에 담채, 39.7x66.7cm, 개인소장)나 자신이 살던 집을 그린 ‘인곡유거도’(종이에 담채, 27.3x27.5cm, 간송미술관 소장) 등의 그림을 보면 선비로서 단아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나 그 주변 풍경들을 그가 얼마나 정감 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선에게도 생애 한차례 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으로 집안이 급격히 기울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인왕산의 청풍 계곡에 있던 외가가 큰 부자였으며 당시 외가에는 학문과 예술을 이야기 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학문을 접했으나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 보다는 그림그리기에 빠졌다. 당시 중국에서 들여온 ‘당시화보’와 ‘개자원화전’같은 그림본들을 스승삼아 혼자서 습득한 것이다. 작고 세밀한 표현이 필요한 초충도와 영모화로부터 스케일이 큰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으로 그림공부를 해 붓이 커다란 무덤을 이루었다고 한다.

‘박연폭포도’

중국의 그림을 보고 베껴 그리는 것이 답답해지고 한계를 느낀 정선은 늘 보는 우리의 강산을 그리고 싶은 간절함이 일었다. 이러한 간절함은 조선의 강산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색하는 경지에 다다른다. 산의 봉우리와 골짜기, 계곡물, 바위, 울창한 숲, 계절과 기후의 변화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화폭에 옮기기 시작했다. 단지 사실적인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가 대상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징을 찾아 그것을 장점으로 드러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산을 그릴 때는 그 산이 갖고 있는 강한 인상을 찾아 부각시키고, 강을 그릴 때는 그 강만이 갖고 있는 부드럽고 잔잔한 이미지를 찾아 그려냈다.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혹은 그리는 이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그것이 화폭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정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바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했다.

황해도 개성의 명물 박연폭포를 그린 ‘박연폭포도’(종이에 담채, 119.1x52cm, 개인소장)는 양쪽으로 거대한 암벽이 앞으로 불거져 나오도록 그렸고 뒤로 하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위압적이다. 물이 시작되는 위에는 반달보양의 바위가 가운데 물살을 막고 있어 물살이 더 세게 느껴지고 있으며 화면의 아래 고여 있는 물 가운데 역시 같은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어 거대하고 웅장한 절벽의 분위기를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필휘지로 휘몰아치듯 그린 그림 같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박연폭포의 이미지를 잘 담은 그림이다. 이것이 정선이 완성했다는 진경산수화의 매력인 것이다.

전국을 돌며 사생을 즐겨 했던 정선은 이병연(시인, 1671~1751)을 통해 금강산을 만나면서 크게 감동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정선은 금강산을 여행한 그림을 그려 이병연이 시를 붙이도록 했으며 이때의 그림집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바다와 산의 초상화’라는 뜻으로 금강산과 그 주변의 바닷가 경치를 초상화 그리듯 섬세하게 담아낸 것이다. 이 그림은 훗날 그의 나이 72세에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종이에 수묵, 79.2x138.2cm, 국보 제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정선은 인왕산을 그냥 산으로 두지 않고, 자신이 성장시절 즐겨 보았던, 그림에 빠져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영감을 주었을, 자신을 있게 한, 정신적인 흠모의 대상으로 그려낸 것 같다. 그래서 그림 안에는 오직 그림에 평생을 건 화인다운 면모가, 그만의 경지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38세에 종 6품 세자익위사위률로 첫 벼슬길에 오른 정선은 46세에 경상도 하양현감, 경상도 청하 현감, 양천 현령 등의 벼슬을 거쳐 70세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다시 한양의 풍경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나이 76세에 그린 것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종이에 수묵, 79.2x138.2cm, 국보 제216호, 호암미술관 소장)다. 이는 정선의 말년 그림이면서도 그 그림의 표현기법이 힘 있고 육중해 정선의 그림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 그림은 백악산 남쪽 기슭에 올라가 여름철 장맛비가 쏟아진 뒤 개어가는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경산수화의 결정판이며 정선의 그림세계가 최고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확인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인왕산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벽의 산이다. 화면은 우선 하늘 아래 거대한 공룡이 무리지어 엎드려 있는 것 같은 인왕산 봉우리 중 가장 크고 높은 봉우리에 시선이 모아진다. 이 중심 봉우리는 거칠고 굵은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듯 반복적인 붓질을 가한 것이다.

멀리 보이는 육중한 화강암 바위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면 아래에 펼쳐진 작은 봉우리들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중심의 큰 봉우리를 향해 집결돼 있는 것 같은 형상을 이룬다. 진하고 엷은 먹의 강약 조절을 통해 산허리의 구불구불한 입체적인 느낌을 맘껏 살려냈다. 이 산허리에서 좀더 아래 완만한 경사면으로 내려오면서 먹은 좀더 연해지고 곳곳에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된 표현기법으로 그린 조선의 소나무를 배치한 것이 압권이다.

마지막 하단에 정선 자신의 집인 듯한, 선비의 집은 기와지붕만 상징처럼 드러냈으며 그 주변을 좀더 강하고 진한 소나무 무리와 아래로 나뭇잎을 늘어트린 느티나무들로 빼곡히 채웠다. 어느 부분은 진한 먹을 중첩시켜 더욱 강하고 육중하게, 어느 부분은 엷은 먹물로 부드럽게 표현해 비 그치고 난 뒤의 안개가 옅게 깔린 인왕산의 고적함을 충만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정선은 무슨 생각으로 이 ‘인왕제색도’를 완성했을까. 정선은 인왕산을 그냥 산으로 두지 않고, 자신이 성장시절 즐겨 보았던, 그림에 빠져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영감을 주었을, 자신을 있게 한, 정신적인 흠모의 대상으로 그려낸 것 같다. 그래서 그림 안에는 오직 그림에 평생을 건 화인다운 면모가, 그만의 경지가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김정애/ 문화담당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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