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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2.09.19 18:23: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유병택

시인,충북문인협회장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조카들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랐다. 산성의 남문인 지화문(至和門)에서 수어장대(守禦將臺)까지는 잰 걸음으로 30분 넘게 걸렸다. 수어장대는 청량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지어 놓은 지휘용 누각이다. 잠실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태풍 볼라벤이 멀리 지나가지 않은 새벽이라 바람은 차고 드세었다. 375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을 떠 올리기에는 미흡한 날씨였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 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갔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았다. 거기서 인조는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禮)를 올렸다. 조선 왕조가 건국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 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7년전쟁'이라는 임진왜란 때 왜(倭)에 납치돼 간 숫자를 3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로 어림하고 있다. 그러니 이 '50일 전쟁'으로 백성이 견뎌야 했던 지옥의 모습이 얼마 했던가를 짐작이 갔다.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지만, 항복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천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야만 했다. 그뿐이었는가,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를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은 항복이 아니라,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했던 정부의 대응입니다.

정부의 외교적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책(無策), 무모(無謀)가 백성의 지옥을 불러왔던 것이다. 우선 당시 정부의 대응은 전(前) 정권인 광해군(光海君) 시절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다. 광해군은 청태조 누루하지 진영에 여진어(女眞語)에 능통한 역관(譯官)을 끊임없이 들여보내 정세를 살폈다. "전쟁을 벌이고 있더라도 사자(使者)를 왕래시켜 그곳 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게 광해군의 지론이었다. 외교적 발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외교 기밀이 세나가지 않도록 하는 데도 각별히 신경을 쏟았다. 조정의 중요 외교정책 결정사항을 그때의 관보(官報)인 조보(朝報)에도 싣지 못하게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행동으로 자주국방을 거듭 강조했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무재(觀武才)라는 병사들의 무예 시범을 친히 참관하고 격려했던 것이다. 청의 기병(騎兵)을 저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어 부대인 5000명의 조총수(鳥銃手)를 힘들여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바깥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책상론자들의 강경론을 특히 경계하였다. "열 사람이 멀리서 본 것을 한 사람이 몸으로 겪은 것만 못한 법이오"하던 부왕(父王)에게서 전해들은 지혜였다. "우리 병력으로는 저들을 막기 힘드니 겉으론 어루만져주면서 안으로 힘을 기르는 계책(計策)뿐"이라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임진왜란의 참전경험과 이런 과정을 거쳐 얻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고 들어섰던 인조(仁祖)정권은 이 모든 것을 뒤집고 결국 나라의 치욕이고 백성의 지옥이었던 병자호란을 불러 왔었다.

이런 생각에 항복터인 옛 삼전도를 찾아가기에는 개운치 않았다. 송파구청에 전화로 묻고, 물어물어 찾아간 주택가 한복판에 비석이 있었다. 흔히 삼전도비, 비석에 새겨진 명칭대로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公德碑)'라는 비석이다. 비석의 부끄러운 옛 글귀는 세월에 씻겨갔지만, 역사의 치욕, 백성의 지옥은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치욕은 파묻을 게 아니라 꺼내 씹어야한다. 그래야만 '바깥세계를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던' 그때 그 위정자(爲政者)의 거울로 오늘의 위정자를 바춰볼 수 있기에 말이다. 오는 12월 19일 대선출마 후보들이 거의 확실해 졌다. 사사로운 시시비비와 인기 영합으로 정권쟁취 수단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두 번 다시 치욕 되지 않을, 5000만의 대한국민에게 다시는 지옥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국가관으로 국민에게 심판을 받았으면 한다. 후보자들은 남한산성의 삼전도비. 즉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公德碑)에서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국가관을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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