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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우륵 '제천 청풍' 사람 재확인

100여 년 전 황성신문 보도 내용 발굴

  • 웹출고시간2023.11.26 13:53:36
  • 최종수정2023.11.26 13:53:36

황성신문 1903년 4월 20일자 '악사 성열(省熱)은 청풍현 사람 우륵' 통설화.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충북일보] 악성 우륵이 제천 청풍 태생임을 확인하는 100여 년 전의 신문자료가 발견됐다.

구한말 시대 1903년 4월 20일 자 황성신문 중에 '命樂師省熱又曰沙熱今淸風縣人于勒造十二曲'이라는 구절로 (사)내제문화연구회 류금열 전문위원에 의해 발견됐으며 이는 '성열(省熱) 또한 사열(沙熱)이라고 말하던, 지금의 청풍현(淸風縣) 사람 우륵에게 12곡을 만들게 하였다'라는 의미다.

(사)내제문화연구회(회장 김흥래)는 오랜 기간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서 언급한 제천 관련 유적과 문화를 조사 발굴해 오던 가운데 '악사 우륵은 성열현사람(樂士省熱縣人于勒)'이라는 구절을 집중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청풍에 우륵의 영향이 남아 있으며 1893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관현악단이라고 할 수 있는 '청풍승평계'가 주민들에 의해 조직돼 1950년 6.25전쟁 때까지 지속됐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악사 우륵은 성열현, 즉 제천 청풍에서 태어나 가야에서 활동하다 가야 멸망 후 제천과 충주에서 연주 활동을 했으며 주로 제천 의림지 부근에서 생활했음이 확인됐다.

이미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韓疆域考)'에서 우륵이 제천 청풍 출신이라고 기술해 조선시대에 통설로 정립됐음을 알 수 있으며 이번 구한말 1903년 당시 황성신문 게재 기사를 통해 '우륵은 제천 청풍 사람'이라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통설을 재확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경남 의령에서 우륵의 출생지 연고에 관한 주장은 역으로 그 근거가 성립되지 않음이 증명됐다 할 수 있으며 이번 황성신문 보도자료 발굴로 우륵은 제천 청풍 사람으로 정립하는 공신력을 갖추게 됐다.

(사)내제문화연구회 류금열 전문위원은 "뒤늦게 우륵의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시·군들이 있는데 이제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소모적 주장을 지양하고 우륵은 제천 청풍에서 태어나 가야 등에서 활동하다 가야 멸망 후에는 고향인 제천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을 인지해 각각 해당 지역에 맞는 홍보와 선양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제천 / 이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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