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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지구 아파트 숲에서 월운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가을시간 속 익어가는 담쟁이 아래에 초라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좁은 길이지만 그래도 버스가 다니는 도로다. 현재는 상당경찰서와 동남지구 아파트가 들어온 뒤 새로 생겨난 넓은 도로에 밀려 더 작아진 듯 보이는 도로 가에 위태롭게 서 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비석으로, 뭐라 쓰여있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마모가 심하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비석의 유래는 옆에 기록되어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효자양수척지비(孝子楊水尺之碑)라고 쓰여 있다. 양수척은 조선시대 천민계층의 하나로 목축, 도살, 유기업 등을 하던 천민으로 후에 백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말타기에 능하고 유랑을 하면서 다니던 사람들로 일반 정착민들과 결혼도 잘 하지 않았다고 하니 지역 주민 사이에서 평판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 도적으로 변하고 산으로 들어가면 잡을 길도 없으니 더 무섭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천민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당시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기념적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양수척, 사람 이름은 아니지만 사람 이름처럼 들리는 이 양수척은 앞서 말한 천민의 계층이다. 당연히 배우지 못하고 본능대로 살고 이름도 없었으니 천민 3형제라는 명칭쯤으로 기록된 것 같다. 그들에게 효를 가르쳐준 사람이 남일면 효촌리에 살던 남계(南溪) 경연(慶延,1522~)으로 서로 동시대를 살았으니 양수척 3형제도 1500년 초중반의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로 생각된다.

양수척 형제는 운동동 비선거리에서 두 아우와 살고 있었다. 주위에 평판이 좋지 않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으나 효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에 들어 병 수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각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려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인근 남일면에 살던 남계 경연선생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삼형제를 불러 꾸짖고 가르쳤더니 이에 형제가 감명해 그 후 노모를 잘 모셨다고 한다. 이렇게 건조한 내용으로 비석이 세워 질리는 없고, 신비한 전설이 때마침 등장할 때였다.

모친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니 형제는 급히 청주성으로 가서 약을 지어 어머니께 돌아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홍수로 물이 불어 월운천을 건너지 못하게 되어 이를 한탄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게 되었다. 그때 자연의 희한한 조화로 하천의 물이 갈라져 형제는 천을 건너서 무사히 어머니의 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다. 당시에 월운천이 얼마나 폭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큰 비가 아니고서야 쉽게 건널 만큼의 개울인데 실감 나지는 않지만 당시의 전설을 믿고 천민 효자 형제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양수척 3형제를 계도한 효자 경연은 숙종이 비석까지 세워줄 만큼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경연 효자비(慶延 孝子碑)는 효촌이라는 명칭이 유래 될 만큼 남일면의 자랑이었는데 당시에도 그런 소문이 30리도 안 떨어진 운동동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는 중앙 집권이기는 하나 교통의 발달이 덜 되어서 지역 자치로 운영이 되었고 그 운영의 기본은 국가에 충성을 하여야 된다는 막연한 의무와 사명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시적 의무와 사명이 바로 효였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효 이야기는 비석으로 잘 기록해 놓았다. 부모를 잘 봉양하는 효자, 효녀들의 이야기는 결국 국가에 충성하는 아버지와 같은 왕을 잘 모시라는 것이다. 백성은 지역 사대부를 잘 모시라는, 보이지 않는 다단계적 세뇌였다. 사대부의 훌륭한 활동을 보면서 일반 백성보다 타고난 혈통, 품성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그 활동을 왕이 내려준 비석으로 인해 넘을 수 없는 백성의 한계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천민 양수척3형제의 이야기 비석은 새롭다. 인간에 대한 도리라는 새로운 관점을 줄 수 있는 비석으로 생각된다. 이는 양수척3형제의 효자비가 신분을 넘어 오히려 백성과 사대부를 계도할 수도 있는 인간 삶의 방식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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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