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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식

시인, 충북문화재단 기획운영팀장

알싸한 바람을 맞습니다. 흔들리며 바람은 다가오고 작은 생채기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어디에선가 문득 봄 냄새가 물씬 풍겨옵니다. 기억을 주섬주섬 모아 한가한 길 위에 앉아 술 한 잔 마십니다. 잔 위로 흔들리는 봄이 눈가를 적십니다. 그리도 보고 싶다 종종댔는데 벌써 내 안에 활짝 피었습니다. 봄이 벌써 꽃이 된 것을 바보처럼 저 혼자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둔합니다.

나른한 오후, 눈치껏 휴식을 취해보지만 영 불편합니다. 젊은 직원들이 힐끗 보고 있는 것 같아 제대로 눈 한번 길게 감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멀리 사무실 창밖으로 봄이 달려옵니다. 문득 휴대폰을 꺼내들고 멍하니 쳐다봅니다. 전화 걸 곳이 없습니다. 천여 명이 넘는 지인들 중에 마땅히 전화 걸어 푸념할 곳이 없습니다. 이제껏 살며 크게 잘한 것도 없지만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정말 난감합니다.

늦은 저녁 무심천을 마냥 걷습니다. 한 모금의 한숨과 흐르는 물소리에 잠시 취해봅니다. 근처 어디선가 들리는 구성진 노랫가락에 몸을 맡깁니다. 요즘엔 옛 노래가 귀에 쏙 들어옵니다. 나이가 드는가봅니다. 노래를 듣다보면 눈물도 나고 따라 부르다 상념에 잠기기도 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꽃바람에 휘날리던 그 많은 날들 중에 뜨겁게 사랑하던 그 입술이 스쳐 지나갑니다. 또 그렇게 그 해 봄날을 훠어이 떠나보내며 엉엉 울었던 날들을 종이배 띄워 보냅니다.

세월은 흐르는 것만은 아니지요. 또한 산다는 게 모래를 쥔 손 같습니다. 잡으면 잡을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습니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여정은 흐르듯 비워가는 것이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날들 또한 비워가는 것이지요. 어차피 그렇게 살아왔는데 무에 그리 아리고 쓰린 것이 많을 라고요. 그러나 불쑥 찾아오는 열병 같은 아픔이 없는 인생은 어쩌면 죽은 것이겠지요. 저 꽃처럼 느닷없이 내 가슴에 피어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지요. 햇살 담뿍 담고 있는 찔레꽃이며 생강나무 꽃향기에 취해 앓던 사랑의 뜨거운 입김이 있는 한 아직도 가슴엔 꽃이 피어나지요. 봄은 그런 것이지요.

이 화창한 봄날, 아직도 내 안에 핀 꽃을 던지지 못하는 작은 망설임을 봅니다. 저 혼자의 상념에 잠겨 있는 자신이 아픕니다. 누구나 다 가슴 속에 불 하나씩 달고 살지요. 그 불이 자신을 비추기도 하고 세상을 비추기도 하지요. 그러나 나는 내 안의 것만 보아왔습니다. 남과 더불어 비취고자 못했습니다. 함께 피워야 봄이라 했거늘 저 혼자 꽃피려 했던 건 아닌지 뒤돌아봅니다. 부끄럽습니다. 꽃잎 진 다음에야 꽃이 핀 것을 아는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온 사방에 꽃향기가 날아다닙니다. 젖은 하늘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비가 오시는 봄날 피지 못한 꽃향기가 날아다닙니다. 아우성처럼 울며 봄들이 지고 있습니다. 하얀 날갯짓으로 소녀상 근처를 비에 젖어 나비 떼가 날아다닙니다. 바다 저 깊숙이 잠겨져있는 새파란 풀잎들의 넋들이 날아다닙니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책임지는 것일진대 그 곳에 꽃이 지고 있는 것을 이제야 보았습니다. 그렇게 피고 있는 것만 보았지 지는 봄과 같이 울지 못했습니다. 또 이렇게 먹먹한 가슴으로 봄날은 가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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