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미 봄입니다

김희식

시인, 충북문화재단 기획전략팀장

봄입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산수유며 매화나무에 혓바닥 내미는 움들을 보노라면 괜히 가슴이 뜁니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부드럽게 감싸 안습니다. 이럴 때면 눈을 감아봅니다. 두런두런 일어서는 생명의 소리가 귓가에 맴돕니다. 들판에 보리며 마늘의 시퍼런 입사귀가 솟구쳐 오릅니다. 포로롱 날아오르는 새의 날갯짓이 참 따뜻합니다.

벌써 이만큼 봄이 왔는데도 한참동안이나 봄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봄이 지난 뒤 봄을 아는 아둔함으로 세상을 삽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이 때에 맞춰 사는 것인데 요즘은 하루하루를 가늠하지 못한 채 살아 왔습니다. 번듯하게 세상에 당당히 살고자하지만 매번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습니다. 봄 햇살 받으며 뒤 돌아보니 매번 허우적거리며 실수도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내 모습이 저기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 같습니다. 며칠 전까지 외투며 속옷을 껴입고 살았는데 요 며칠 따뜻한 바람이 부니 벌써 여름 걱정을 합니다. 짧아진 봄이 매번 아쉽기만 합니다. 눈뜨기 어지러운 하늘에서 꽃비가 내립니다. 살며 기다리는 것들이 왜 이리도 후딱 지나가는지 야속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게 사는 게지요. 이 봄 눈부신 햇살을 아프게 품습니다.

모진 겨울을 거쳐야만 더 짙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봄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절 경쟁과 환호 속에 한국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같이 가야할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저 먼저 앞으로만 달려 나갔습니다. 사람 사는 게 서로 손 잡아주고 서로 일으켜 주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제 세상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겨울의 절망을 품고 아파해야 하나요. 세월은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운 욕심과 가식을 벗어던지라 끊임없이 소리칩니다. 봄은 모든 것을 안아주는 생명입니다.

지난 겨울의 끝자락은 참 혼란스러웠습니다. 가슴 한편에 매달린 먹먹한 아픔도 있었습니다. 살며 힘들고 안타까운 날들이야 어디 한두 번 겪겠습니까. 매번 위태하고 매번 힘든 게 인생이 아닐까요. 오늘이 어제의 오늘이 아니듯 우리 인생은 매번 새로움에 닿아있는 것이지요. 언제부턴가 바람 불면 바람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산천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겸허해집니다. 그렇게 곱게 사라지는 것을 준비해야죠. 어차피 세상 열심히 살아도 다 봄볕이니까요.

다 털고 가야지요. 그래야 가볍게 인사도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묵은 아픔이 있으면 지금 먼저 손 내밀어 용서를 구해야지요.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요. 그래야 용서도 있고 화해도 있는 것이지요. 함께 살아가는 터전에서 언제까지 가슴에 시린 미움을 안고 살려하나요. 봄은 모든 죽은 것들을 일으켜 세우고 겨우내 앓던 것들을 치유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봄을 기다리며 새로움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이 봄의 아우성이야말로 희망의 노래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축복입니다.

사람 사는 게 길을 찾아 가는 것이지요. 그 길에 늘 실수투성이의 몸을 끌고 가는 게 인생이지요. 그만큼 아파하고 그만큼 희망을 꿈꾸지요. 한없이 사랑하고 한없이 절망도 합니다. 봄을 꿈꾼다고 찬란한 봄은 오지 않습니다. 햇살이 눈부셔 눈물 나는 게, 살아있음이 너무도 황홀해 눈물 나는 게 봄이지요. 상처받지 않은 꽃들이 어디 있으며 아파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물 같은 날들이 넘치게 옵니다. 먼 바다에서 부는 그리움이 생채기 위에 꽃잎 되어 떨어집니다. 떨어진 이파리 위로 낮게 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이미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