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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세명대 교양대학 부교수

지난달 학술대회 발표를 위해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하게 되었다. 아프리카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직항이 없어 반드시 경유해야 했기에 비행시간만 최소 20시간이 넘었다. 출국 2주 전에는 콜레라,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을 예방하기 위한 주사를 여러 개 맞고 약을 먹어야 했다. 현지에서 생길 "만일"을 대비한 여러 준비물을 챙기는 일 또한 제법 신경이 쓰였다.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대륙을 가기 위한 준비 절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니 그 지역을 방문할 때의 주의점이 수도 없이 나왔다. 대개는 공포심을 조장하며 겁을 주는 내용들이다.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하거나 고가의 옷을 입으면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화려한 옷차림은 피하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대단히 화려하고 비싼 옷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더 초라한 옷들만 챙겨 넣었다. 출발하기도 전에 벌써 두려움이 밀려왔다.

막상 도착해보니 그곳은 오기 전 겁먹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평온했다. 그간의 오해가 미안했다. 마음이 놓이고 정도 들기 시작했다. 학회 일정을 마친 후 연구를 위한 현장 조사 차원에서 해당 지역 슬럼 방문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슬럼(slum)은 쉽게 말해 도시의 빈민 구역을 뜻한다. 대개 슬럼은 쓰레기 방치 등으로 인한 위생 문제를 비롯하여 마약, 강도 등 각종 범죄위험에 노출된 우범지역으로 분류된다. 도심에서 30분가량 차를 타고 갔더니 말로만 듣던 슬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탄 차가 지날 때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도심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차에서 내리니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청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청년 사업가들이라고 했다.

그들 중 리더 격인 한 청년이 붙어 있는 집들 틈새로 난 좁은 길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는 각 가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들을 어떻게 모으고 처리하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은 슬럼에서 생산된 쓰레기를 조직적으로 수집한 후 이를 재활용하여 사용가능한 물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벽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동물 뼈로 장식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녹슨 철사가 근사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되는 과정은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골목을 지나다닐 때면 동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거나 영어로 대화를 청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들은 가난에 절망하지 않았다. 지역이 새로운 사업으로 변화할 희망에 차 있었고, 청년들이 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마주하고 나자 그간 내가 가졌던 지나친 경계와 공포가 부끄러워졌다. 알지 못하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혹은 경험이 닿지 않았던 영역이라는 이유로 대상화하며 납작하게 바라보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태도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제 슬럼을 이야기할 때 더 이상 가난, 범죄, 비위생 등과 같은 단어에만 연결 짓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조용하게 피어오르는 희망, 그것이 가장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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