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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6.22 16:12:32
  • 최종수정2023.06.22 16:12:32
"자기야 나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자고 그랬어?" 아내가 '답정너'를 요구했다.

"아니 뭐 당신 오빠가 노처녀 구제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하길래 적선하는 셈 치고…"

삐뚤어도 한참 삐뚠 대답으로 아내를 놀리며 티격태격 사랑싸움하던 신혼 시절이 아련하다.

고등학교 절친인 친구와 저녁을 먹고 술자리를 갖게 됐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친구가 심각하게 물어왔다. "도청에 괜찮은 총각 없니?"

"응? 우리 회사엔 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웬 총각 타령이여?"

"우리 집에 노처녀가 있잖아. 내 동생 말여."

"가만있어 보자, 총각은 나뿐인데, 나는 어뗘?"

장남에 의지해 사시던 어머니가 내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서 장가는 언제 들 거냐며 걱정하셨다.

"알아서 할게유." 하고 돌아섰지만 어머니는 내가 장가를 안 가면, 부모가 못나 큰아들 장가도 못 보내고 있다고 자책할 게 뻔했다.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이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아내와 산책하는 모습도 부러웠다.

내 처지를 이해하는 여자만 있으면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직장 상사나 어른들이 주선한 소개로 여러 번 맞선을 보기도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과 같이 산다는 말을 듣고도 신혼집과 재산을 물으면 3백만 원짜리 전세금이 전부라고 들려주었다.

어쩌다 얘기가 잘 통한 여자는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미안하단 통보를 받던 시절이다.

술김에 친구에게 호기를 부렸지만, 솔직히 기대보다는 체념을 하고 있었다.

며칠 후 친구가 답을 가지고 왔다. 동생이 한 번 만나보겠다고 한단다.

분명 고대하던 소식인데 걱정이 앞섰다.

"너, 네 동생한테 내 사정 얘기했어?"

"아니 그건 네가 말해야지. 아무튼 만나서 잘 얘기해봐. 나는 너를 아주 적극적으로 밀었으니까."

가급적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할 것인가. 양말 속을 뒤집어 보일까 고심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오빠가 어떻게 내 얘기를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홀어머니와 동생 네명, 여섯 식구가 두 칸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함께 살아야 하구요."

"네, 오빠한테 들었어요. 저도 칠남매로 북적대는 집에서 커서 그런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공무원 월급 적은 거 아시지요? 생활이 많이 쪼들릴 거예요."

"절약하며 쓰면 되겠지요. 저도 다소나마 벌면 되고요. 저는 사업하시는 분보다는 공무원이나 선생님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분을 원했어요."

'아! 인연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쐐기를 박는다고 무슨 배짱이었는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삼국지의 장판파 전투에서, 조자룡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 유비의 처와 자식을 구해오자 유비가 말했다는 '부모 형제는 수족이요, 처자식은 의복(夫母兄弟 爲手足 妻子息 爲衣服)이다'는 얘기를 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 대목을 좋아하고 신봉한다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순간 '아! 이 여자구나. 이 여자를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후 우리는 뜻이 맞아 결혼을 하였다.

많은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내와 저녁 술을 한잔 나누며 그날을 회상한 적이 있다.

아내는 오빠의 권유를 믿었고 또 그동안 나를 보아왔기에, 어느 정도 마음이 기울었던 상태였단다.

해서 무슨 말이든 물어보면 "아, 네, 알겠어요. 그렇겠네요"로 대화를 나눴지만 조자룡은 이름만 어렴풋이 알았단다.

의복이니 수족 얘기는 알지도 못했거니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얘기를 듣고 시집을 왔겠냐며 펄쩍 뛰었다.

'나 어뗘'를 피력한 지 4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

살아오면서 산과 골이 없이 평탄한 길만 걸었겠느냐마는 결혼 전과 비교하면 한결 다복한 삶이었다.

서로가 등 돌리고 눕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각방을 쓰지도 않았고, 시장에서 고등어 한 손을 선뜻 집어 들진 못 했어도, 남들에게 돈 빌리러 가진 않았다.

모임에서 모두가 시어머니, 시동생 흉을 보는데 난 할 말이 없었다는 아내의 고백도 있었다.

어머니는 맏며느리 잘 들어와 형제 간 우애가 좋다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내색하지 못하고 아내를 놀리느라 노처녀를 구제했다고 했지만, 실상 아내가 노총각인 나를 구제해준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아내의 덕분으로 새삼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이 맺어준 백년가약 원앙새로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리.

신성용

푸른솔문학 신인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충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충북도 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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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