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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1.12 16:11:23
  • 최종수정2023.01.12 16:14:06
야윈 겨울이 봄을 기다리듯 우리가 천년의 세월을 기다리는 세상이 있다. 그 환희로운 세상을 약속한 이는 누구일까. 도심을 가로지르는 물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무심천 언덕 위에 미륵도량 용화사가 있다.

용화사의 가람배치는 그대로가 자연이다. 전각은 둘인 듯 하나로 이어져 있고 공간은 분별과 대립 없이 두루 통하여 능선처럼 흐른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랜 세월 절 마당을 지켜온 삼층석탑도 무언의 가르침을 전한다. 자신을 바로 보고, 마음을 바로 보라고. 마음이란 지혜를 가리키는 것. 부처님의 참모습은 고요한 마음이다. 암자에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 메아리로 퍼지고 거기에 바람 소리마저 더하니 세상 근심이 잠시 사라진다.

용화사의 주불전은 삼불전이다. 그 중심에 미륵불을 모셨다. 네모진 얼굴에 그윽한 미소. 듬직하고 편안해 보이는 몸 위에서 매끄럽게 흘러내린 옷 주름. 가슴은 숨을 들이쉴 때처럼 자연스럽게 부풀어 올라 그 품이 더욱 넓어 보인다. 담백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고려시대 불상이다.

누가 이곳에 미륵불을 세웠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미륵신앙은 열심히 수행하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현세에는 없는 이상세계. 삶이 힘들고 괴로울수록 내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많은 염원이 저 미륵불 속에 담겨있었을 터, 미륵을 기다리는 그 옛날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 손에는 감로병을, 다른 한 손에는 약합을 들고 조용히 안심법문을 전하고 계신 약사여래 부처님.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그렇게 경책(輕責)하면서도 약사여래 부처님은 몸의 아픔, 마음의 아픔, 중생들의 모든 아픔을 치유해 주고자 오늘도 한결같이 미륵불 옆에 서 있다.

삼불전 옆 적묵당, 스님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다. 출가자의 바람은 비워도 비워지지 않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세상일 뒤로하고 고독하게 홀로 앉은 수행자는 흐르듯 열린 공간에서 비우고 채우는 일을 반복한다. 법구경에 '녹은 쇠에서 생기는데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쇠와 같아서 마음이 그늘지면 심신도 서서히 녹슬고 만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녹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유마힐 거사는 생멸이 둘이라 하지만 법은 본래 생도 없고 멸도 없는 것이라 했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도량에서 과거와 현재가 둘이 아니고, 자연과 문명이 둘이 아니며, 정과 동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법문을 되새겨본다.

구름도 잠시 갈 길을 멈춘 듯 적막한 암자에 고요가 깃들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는 하얀 연등만이 바람에 나부끼며 도량을 장엄한다. 바람이 흔들리는가. 연등이 흔들리는 것인가. 흔들리는 것은 그대의 마음뿐, 마음밖에 다른 것이 없다던 옛 선사의 가르침에도 중생의 눈에는 여전히 바람이 흔들리고 연등이 흔들린다. 중생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인지.

저 멀리, 우암산 자락을 병풍처럼 펼쳐놓고 스님이 붓을 들었다. 정갈하게 써 내려가는 글씨 하나하나에 수행자의 정신을 담는 동안 스님은 묵향삼매에 빠져들었다.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한번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으면 가정에 평화가 깃든다. 스님이 종종 불자들에게 전하는 생활의 가르침이다. 암자는 말한다. 생명을 다한 나무가 새 생명을 키워내듯, 우리네 인생도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때 비로소 새로운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우리가 몇 겁을 거듭하더라도 흔들림 없는 불심으로 구도행을 실천해야 갈 수 있는 미륵의 세상. 그 간절함이 바위를 쪼아 미륵불을 만들었다. 무심천 언덕 위에 작은 절도 지었다. 부처님 열반 후 오십육억 칠천만 년 후에 이 땅에 오신다고 했던 미륵의 약속. 이곳 용화사에서 오늘도 기다린다. 미륵이 말한 약속의 그 날을.

김규섭

푸른솔문학 수필등단
푸른솔문인협회 부회장
충북대학교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새벽을 사랑하는 남자'
청주시청 문화재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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