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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차 한잔에 담은 마음

  • 웹출고시간2023.10.19 17:15:04
  • 최종수정2023.10.19 17:15:04
어느덧 가을 달빛도 고요하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은은하다, 새벽녘엔 제법 서늘한 기운이 창문 틈으로 파고들어 이불깃을 당긴다. 아파트단지 둘레의 나무에는 아직 신록이 남아 있지만, 잎사귀들은 곧 제빛을 잃고 울긋불긋 고운 색을 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단풍이 되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가으내 쓸고 치워야 하는 낙엽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진다.

오늘따라 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냅다 달리는 차 소리가 소음이 되어 간간이 귓전을 스친다.

묵은 대추를 푹 끓여 만들어 두었던 음료를 커다란 대접에 담아, 쟁반에 조심스레 받쳐 들고 아예 찾아 나섰다. 14층부터 내려가는 계단은 주전자에 덜 풀어진 미숫가루 물 한가득 담고, 들판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찾아 동구 밖을 향하던 길처럼 느껴져 발걸음이 빨라진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3층에서 아주머니를 만났다. 서로 반가워하며 바닥에 같이 주저앉았다. 그녀가 말할 적마다,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다던 한쪽 눈이 추임새처럼 찡긋댄다.

무심결에 생각이 나서 찾아 나섰건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반갑다. 함박꽃처럼 활짝 마음을 열고, 젊어서 남편 여의고 홀로 자식들 키우며 살아온 고달픈 인생을 들려준다.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었는데 그것도 알게 모르게 든 정이었나 보다. 이렇게 한잔의 음료라도 주는 이의 작은 마음이 얹어지고, 받는 이가 조금이라도 성의를 알게 된다면 어느 명품 차가 좋다 한들 이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 마시는 차는 고독을 달래며 아취(雅趣)를 더하지만,둘이 나누는 차는 그윽한 차향 속에 스스럼없는 담소로 서로의 경계를 없애준다. 그녀와 따듯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저절로 맑고 향기로운 차처럼 마음이 유순해진다.

한쪽 눈으로 살아온 세상을 원망도 없이, 속내를 찬찬히 풀어내고 웃음 지어주던 모습에 일상에서 안달복달하며, 감정조절도 잘하지 못한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그녀는 다른 쪽 눈도 시력을 잃고 있어 다음 달에 수술 날짜를 잡아 놓았단다. 이제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며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여 주는, 눅진한 사탕 때문인지 가슴 한편이 서늘하다. 만났다 언젠가는 헤어지는 게 인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순간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윽한 차는 향의 성품도 좋지만, 달큼한 음료를 만들고 있노라면 숭얼숭얼 피어나는 정 같아 누구라도 찾아가 함께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선인들처럼 자연에 동화되어 외로움을 다스리듯, 정을 나누며 잠시나마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앞만 보고 바쁘게 살던 일상의 답답함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난다. 별생각 없이 나섰지만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삶을 대하며 늘어진 정신과 나태해진 생각을 다시금 추스른다.

아주머니는 어렵사리 장가 간 장남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이 깃들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마중 온다는 아들의 살가운 전화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금세 얼굴이 환해진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은은한 차 한잔에 마음 담아 대접받은 듯, 괜한 동정심은 사라지고 어느새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녀는 삶의 격정을 이겨내고 찻상 앞에 돌아와 차분히 앉아 있는 어머니 모습이다. 나는 멀리서, 아니면 책 속에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의 방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 들어보면 내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동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며, 명예와 이익을 따지느라 마음의 눈을 한쪽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 것 같다. 살아오면서 늘 가까이 있는 것에 익숙해져 소중한 줄도 모르고 지나치며 살아온 건 아닌지, 비워진 대접 안쪽을 살피는 것처럼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련다.

이현자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강.

푸른솔문학 등단.

카페문학상 수상.

'목력이 필 때면', '가을을 걷다' 등 공저

새롬내과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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