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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 향연 - 시간이 멈추자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20.04.16 15:23:51
  • 최종수정2020.04.16 15:23:51

시간이 멈추자 - 김참(1973~ )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길들이 지워졌다 시간이 멈추자 공중에 비탈길이 생겼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시간의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둥근 기둥이 있었다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기둥 밑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검은 치마를 입은 처녀들이 기둥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눈이 없었다 코도 없고 입도 없었다 그녀들은 기둥을 지나 나무 밑을 걸어갔다 사람들의 머리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은 열매로 익어가고 있는 나무 밑을 지나갔다 나는 나무 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선가 두 마리 개가 달려왔다 여자들이 기둥을 향해 재빨리 달렸다 시간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었고 별이 있었고 두 마리 새가 기둥 위에 앉아 있었다
[충북일보] 김참은 현실/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환(幻)의 상상력을 통해 기계적 인과법칙이 파괴된 몽유의 세계를 노래해온 시인이다. 꿈의 채색화가이자 환상의 이미지를 찾아 떠도는 여행자 시인이다. 초현실적 풍경과 서사를 통해 그는 상식과 고정관념이 파괴된 이상하고 낯선 꿈의 세계를 그린다. 그의 시에는 유년의 기억들, 현실의 삶이 주는 결핍과 상처가 몽환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현실의 결핍과 부재를 무한 증식하는 이미지들로 보충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욕망의 언어 페인팅인 셈이다. 그는 세계를 매우 복잡하고 혼란한 미로,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속의 거울 등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의 시가 몽환적 분위기를 띠면서도 복잡한 중층의 서사구조를 띠는 건 이런 세계인식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고기는 강과 바다를 헤엄치며 산다. 사람이 느끼는 세계는 물고기나 새들이 느끼는 세계와는 다르며, 나무와 풀, 돼지나 고양이들이 느끼는 세계와 다르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박쥐들에게는 박쥐들의 세계가 있고, 풍뎅이에게는 풍뎅이들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새와 물고기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듯, 새나 물고기도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알지 못하고, 무당벌레와 심해어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나의 시가 세계를 그려내는 작업이라면 이 작업은 끝이 없는 여행이며 모험이다. 때로는 길을 잃고 미로 속을 헤매지만 나는 나의 여행을 사랑한다."

그가 환(幻)의 세계로 진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감각이 시각이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이동할 때 자주 사용하는 통로는 거울, 미로, 그림, 신기루, 사다리, 아파트, 계단 등이다. 그의 시는 외관상 현실을 소외시킨 채 자아의 분열과 카오스, 자폐적 몽상과 환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자아도취의 시, 유아적 공상의 시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주의 시가 포착하지 못하는 현실의 비현실적 측면들을 서정적 환상으로 드러낸다는 점, 논리적 인과성이 지배하는 현실의 은폐된 이면을 초현실적 이미지로 파고든다는 점, 인간의 무의식에 균열을 내어 기존의 관습적 시 문법을 파괴하여 낯선 시의 문법을 탄생시킨다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

그럼 시인은 왜 현실과 꿈,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걸까· 현실이 은폐하는 초현실성에 대한 인식, 현실에 대한 혐오와 환멸 때문이다. 시인 스스로 인위적이고 공작(工作)적인 인공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전복 의지, 논리와 분석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반항성 때문이다. 시는 예술이고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꿈과 환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고 나면 꿈을 적어 두었다가 시로 썼다고 한다.

김참은 시를 쓸 때 일종의 백일몽 상태에 빠져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백일몽 상태란 현실과 꿈의 세계에 동시에 기거하는 자각몽 상태를 말한다. 꿈을 꾸고 있다는 점에서는 잠이고, 꿈을 자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각성 상태다. 즉 시를 쓰는 행위는 곧 수면이면서 불면을 동시에 경험하는 행위다. 꿈속을 거닐면서 자신이 거니는 곳이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그 백일몽 세계가 그에게는 현실과 초(超)현실이 공존하는 몽환의 세계고 그림자들의 세계고 빵집을 비추는 볼록거울의 세계고 그림 속의 인물이 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세계다.

「시간이 멈추자」는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1999) 가장 앞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간이 사라진 세계, 탈(脫)인과성의 환상 세계를 회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시간의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간 화자가 도착한 곳은 시간의 반대편 세계다. 그곳은 달과 별이 있고 검은 치마 입은 눈도 입도 코도 없는 처녀들과 개들이 사는 곳이다. 나뭇가지에 사람 머리통이 주렁주렁 매달려 붉게 익어가는 곳이다. 초현실적 사물과 사건들이 등장하는 그의 많은 시처럼 이 시 또한 서사 자체는 논리적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매혹적인 건 구조의 완결성보다 '끝없는 꿈꾸기'를 가능하게 하고 시간의 억압과 해방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 시를 통해 어떤 이는 유희와 상상의 서사놀이를 즐길 것이고, 어떤 이는 시간의 속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쓸쓸한 내면풍경을 엿볼 것이고. 어떤 이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환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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