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이대흠의 시는 연민과 사랑에서 싹튼다. 그의 시 저변에는 비극의 삶과 세상에 대한 반성, 폭압적 역사와 문명에 대한 아픈 성찰이 깔려 있다. 첫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1997)에는 이런 성찰의 시선이 잘 드러나 있다. 등짝 가득 땀이 흐르고 팔뚝에 굵은 힘줄이 보이는 근육질 시집으로 해머드릴이 울리는 건축공사장 같은 현실에서 시인은 바닥을 사는 자들의 눈물 속에서 거대한 희망의 고래를 본다. 두 번째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2001)에서도 시인은 비극의 삶에 굴하지 않고 굴러가는 바퀴들을 통해 삶에의 의지를 드러낸다. 아스팔트건 자갈밭이건 진창이건 온몸으로 부딪히며 닳아가는 바퀴는 인간의 슬픈 초상이자 생의 무게를 떠받치는 힘과 의지의 표상이다.
이대흠은 리얼리즘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그에게 현실은 단순 모방된 현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화적 리얼리즘 세계,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있어야 할 세계'를 그는 서정의 언어로 그린다. 대상을 관조하여 대상의 결핍과 상처를 읽어내고 대상에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입하여 그리움의 정서를 전한다. 이런 관조적 교감은 대상이 품은 사연과 상처를 구체적으로 끌어안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다. 강, 숲, 꽃, 뱀, 바위 등과의 교감을 통해 그는 대상들이 간직한 속 깊은 내연의 이야기를 듣고 그걸 독자의 가슴에 먹물처럼 번져들게 한다. 번짐은 주로 물과 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현실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시인은 때로는 더러운 물에 몸을 씻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불태워 깨끗하게 정화되기를 꿈꾼다. 그에게 물과 불은 삶의 격동이자 광기의 근현대사가 투영된 의식의 반영물들이다.
고통과 절망의 시대, 그 상처투성이 시간이 남긴 상처를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치유한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걸 끌어안아 삭히는 어머니의 품은 세상을 평화와 상생으로 이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이대흠 시에서 어머니는 고향마을의 핵심 풍경이다. 신산한 삶을 표상하는 애련의 기호고 손바닥에 천 개의 귀를 가진 신비로운 존재다. 힘없고 병들어 죽어가는 식물들이 입으로 쫑알대는 소리를 다 알아듣고 살려내는 존재, 시름시름 말라가던 오이며 호박이며 상사화도 기린초도 수
수문양반 왕자지 - 이대흠(李戴欠 1968~ )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했는데
자식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과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선화도 다 살려내는 생명의 존재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집약하는 어휘 중 하나가 바닥이다. 삶의 바닥, 고통의 바닥, 상처의 바닥, 울음의 바닥에서 샘솟는 생의 의지와 사랑, 그것이 어머니를 통해 발현하고자 하는 이대흠 시작(詩作)의 요체다. 시작의 원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자기만의 사전을 가진 자(者)라는 전제에서 제 시의 에너지는 제가 알고 있고, 제가 운용하는 '언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전라도 태생이고, 전라도에서 살고 있는 저에게는 전라도 사투리가 제 시의 에너지원이라 봐야겠지요. 제 시는 전라도라는 지역의 풍토를 바탕에 두고, 나와 내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사람들의 삶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는 나무나 풀이겠지요."
이대흠 시의 가장 도드라진 특질은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와 억양이다. 허뿍허뿍, 또륵또륵, 타랑타랑, 씌룽씌룽, 알눈알눈, 과냥과냥, 자응자응, 랑랑랑 등 다양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하여 걸쭉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의 향토색 짙은 전라도 사투리 말맛을 느낄 수 있는 시집이 『귀가 서럽다』(2010)이다. 「수문 양반 왕자지」도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곳곳에는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해학의 문장으로 풀어져 있다. 남도 특유의 한(恨)과 어머니의 애잔한 사랑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시의 지향점을 '꽃섬'으로 집약한다. 배를 타고 가다보면 멀리 보이는 섬들은 전부 먹색이지만 그 섬에 들어가 보면, 거기엔 아름다운 풀이 있고 나무가 있고 새와 나비도 있다. 그에게 꽃섬은 '끝내는 아름다움이고야 말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올봄엔 나도 꽃섬에 가고 싶다.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