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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 향연 - 오월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98

  • 웹출고시간2020.05.28 17:11:38
  • 최종수정2020.05.28 17:11:38
조연호의 시는 대체로 까다롭고 비밀스럽다. 시인이 객관적 사실과 의미를 담는데 치중하기보다 주관적 감각을 살려내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인의 감정 흐름에 따라 이미지들이 연쇄적으로 호출되면서 시의 의미망이 복잡하게 형성된다. 주관성이 지나치게 강화될 때 그의 시는 자폐적 폐쇄성을 드러내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폐쇄성이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시의 난해함과 소통부재가 시적 개성을 만든다는 말은 아니다. 그의 시의 난해성과 폐쇄성은 고대 문자와 사상에 대한 탐색, 사어(死語)와 폐어(廢語)의 복원 욕구, 신과 인간에 대한 탐구, 동양적 윤리 세계에 대한 공부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수반된 결과다.

밝은 빛의 세계보다 어둡고 음울한 음지의 세계로 기울어지는 시인의 생리적 기질 또한 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인이다. 그는 양달보다 응달로 감정과 상상이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런 걸까? 유년기의 아픈 경험들, 가난의 시간 속에서 형성된 상처들이 시작 과정에 돌발적으로 튀오나오기 때문일 것. 이 상처들이 사물, 인물, 풍경 속에 다양하게 투영되면서 합리적 사고로 설명할 수 없는 검은 광기의 세계, 고독과 폐허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에게 시는 자신과 세계와 우주를 앓는 아름다운 병이자 치료다.

오월 조연호(1969~ )

비 내리던 오월이 그쳤다. 숲이 가난한 자들의 빈 그릇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모서리에 몰려 서서 심장이 저울질 당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드러운 비에 꽂혀 하늘이 아프게 하수구까지 걸어온다. 쥐들의 지붕 타는 소리가 엄마의 재봉틀 굴리는 소리만큼 크다. (뜻도 없이 문이 밀쳐지고,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이 없을까. 나는 그리다만 그림에 붉은 명암을 넣었다.) 어쩌면 세상은 평안하고, 이렇게 될 줄 예감하면서 주일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쏟아졌을 것이다. 죽은 꽃과 죽은 바람을 차마 볼 수 없어 등燈을 켜지 않았다.

오월은 늦은 식사로부터 와서 늦은 식사로 떠난다. 붉고 지친 꽃잎 위로 지하 방직공장 실먼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늦은 식사, 우는 엄마들, 햇복숭아를 사들고 칠팔월로 훌쩍 가버리는 오월. 분수대에 손을 넣고 바람의 패총을 줍는다. 덜 마른 기억의 껍질들이 손가락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 한 번쯤 분노해야 할 일은 없는가. 비 갠 하늘빛을 따라 느린 삶을 옮기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과 그의 집이 옮겨가며 뒤에 남는 반짝이는 것들이 함께 모두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세대 많은 시인들과 달리 조연호는 유희나 놀이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의미 중심으로 언어를 운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의미를 담는 그릇이기 이전에 시인의 감각과 주관을 담아내는 그릇이고, 시는 의미의 담지 공간이 아니라 감각적 인상의 창출공간에 가깝다. 따라서 그에게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나치는 사물의 순간, 풍경의 순간, 기억의 순간이 중요하다. 즉흥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나 순간적으로 특정 장면을 포착하는 사진사처럼 그는 즉흥적 이미지들로 상징과 비의의 세계를 복사(複寫)한다.

주목되는 것은 독특하고 낯선 풍경들이 현실의 재현물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이 영사된 심리반영물이라는 점이다. 시인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갈망과 번민, 고독과 우울, 사랑과 상처의 감정들이 투사된 육체 풍경들이다. 즉 그의 시에서 풍경은 시인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복기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호환되는 대상들이다. 그의 시에서 투명한 의미보다 불투명한 정서, 의미의 명료한 집중보다 느낌의 불명료한 확산, 비의와 상징으로 가득 찬 낯선 세계가 그려지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다시 말해 풍경은 무수한 비밀과 상징을 숨긴 세계에서 자신의 어두운 감정, 상처, 사유, 상상 등을 추출하기 위한 일종의 여과장치 필터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다분히 인상파 화가들의 작업과 흡사하며 동양적 비밀을 간직한 종교들과 내통한다. 인상의 세계에서는 대상 자체의 형태와 의미보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순간적 감각이나 느낌이 중요하고, 비밀종교에서는 천지창조의 과정이 신비화되고 신과 인간의 관계 또한 극도의 상징적 관계로 처리된다.

조연호 또한 반쯤은 지워진 불투명한 공간과 공간 속의 풍경들과 매우 집요하고 긴밀하게 관계한다. 그 과정 전반이 상징과 암시의 비밀 문장들로 채워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 시와 시 사이에 시인의 사유와 의식이 섞여 들어가 시집 전체를 비밀의 베일에 싸이게 한다. 이 비의의 문장 태동과정에 퇴폐와 타락의 감정, 정신적 통증과 어지러움과 현기증, 거세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유아적 심리가 어두운 색으로 채색되기도 한다. 그 결과 시집은 비의와 암시로 점철된 세계의 상징 복사물이 된다. 우주가 음사(音寫)되고 음사(陰寫)된 세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이 하나의 몸인 시체(詩體)의 지도를 그린다.

「오월」은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에 수록된 어렵지 않은 시다. 슬픔과 암울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으로 시인의 감각적 수용과 표현이 돋보인다. 쥐들이 지붕을 타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 붉은 꽃잎에 방직공장 가는 먼지가 날아와 쌓이는 동네다. 엄마는 재봉틀을 돌리고 주말이면 동네 확성기에서 찬송이 울려나온다. 밤이 되어도 나는 등을 켜지 않는다. 불을 켜면 죽은 꽃과 비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과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동네 주민들, 특히 엄마들의 슬픔이 부각되면서 오월이라는 계절의 화려한 이면에 숨은 삶의 아픈 무늬들이 드러난다. 꽃빛 짙은 이 오월에 화자(시인)은 분노해야할 잃은 없는지 자문한다. 이 물음 속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시인의 분노와 연민이 함께 스미어 있다. 때문에 시의 외적 배경인 비는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흘리는 눈물로도 읽힌다. 비 갠 후, 맑은 오월의 하늘 아래를 느릿느릿 옮겨가는 달팽이와 그의 늙은 집, 달팽이 지나간 뒤에 남은 반짝거리는 것들이 모두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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